이인엽 목사
[ 열왕기상 19장 19-21절 ]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왕상 19:19-21
우린 자주 남들의 성격과 의도를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원래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데 쌀쌀맞은 걸로 오해하거나, 마음이 여린 사람인데 활기차고 강한 사람으로 오해하거나, 우울한 사람인데 신중한 사람으로 오해하거나, 등등 다양하죠. 가까이 사는 부부나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의 성격이나 의도를 오해해서 공연히 서운해 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사람간에 성격과 그 사람의 의도를 바르게 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자주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제가 농담을 할 때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요. 전 개인적으로 농담하는걸 좋아하는데 아쉽게도 제가 하는 농담이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농담으로 안들린다는 거죠. 제가 농담을 잘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웃자고 한 이야기가 상대방을 화나게 만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 성격과 저의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 거죠.
우리는 지금 성경속 인물들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성격과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잘 전달되지 못하면 오해와 갈등만 생기듯이, 성경속의 인물의 성격과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받아들이면 그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는 결과가 생깁니다. 말씀을 오해하는 거죠.
엘리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라는 선지자의 뒤를 이은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선지자 입니다.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야의 사역이 엘리사에게 옮겨가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2장의 내용을 얼핏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내용이 있어요.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자꾸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죠. 그런데 엘리사는 굳이 꼭 따라가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오지 말라는데 기어코 따라가는 엘리사. 뭔가 좀 고집불통 같아보이죠. 뭔가 좀 자기 맘대로인 것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스승의 말도 안듣는 조금 건방져 보이는 사람 같아요.
또 승천하기 직전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어봅니다. “뭐 바라는 것 있니? 내가 너한테 해 줄일 있을까?” 그랬더니 엘리사가 “당신 능력의 두배를 주세요” 라고 하죠. 이구절을 보면 ‘어, 이 사람 참 염치도 없네, 참 욕심도 많네, 참 뻔뻔스러운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죠. 게다가 엘리야가 승천한 후에 엘리야의 선지자 사역을 맡은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어린애들이 나와서 대머리라고 놀리니까 저주를 해서 곰이 나와 4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죽이지 않습니까. 자 외모가지고 놀리는걸로 전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한국사람들, 엘리사를 만난다면 다 죽었어요. 어떻게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다 큰 어른이 애들을 죽입니까. 그것도 42명이나.
열왕기하 2장에 나와있는 엘리사를 이렇게 이해하면 엘리사는 고집불통에 건방지고 욕심많고 뻔뻔스러운데다 옹졸하고 잔인한 대머리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는 정말 그런 인물일까요? 그럴리가 없죠. 만일 그가 그렇게 형편없는 인물이라면 성경은 그에 대한 나쁜 평가를 함께 기록해 놓았을 겁니다. 그는 욕심많은 사람이었더라.. 라든지, 그는 잔인한 선지자였더라.. 라든지. 이런 기록들이 함께 있었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2장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를 고집불통에 건방지고 욕심많고 뻔뻔스러우며 옹졸하고 잔인하게 이해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말씀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는 거죠.
열왕기상 19장 19절에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장면 바로 앞에 나오는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
하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엘리야가 그 말씀 후에 바로 엘리사를 만나는 거죠. 그러기에 우리는 엘리사는 타락하지 않은 믿음을 가진 남겨진 자들 중에 하나였음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제 그런 엘리사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다가 엘리야를 만납니다. 한 겨릿이라고 하면 보통 두 마리의 소를 의미하니까, 24마리나 되는 소들이 밭을 가는 아주 큰 농사를 짓고 있었던 거죠.
엘리야는 이렇게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엘리사를 향하여 자신의 겉옷을 그에게 던집니다. 열왕기상 19장 19절의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왕상 19:19
겉옷은 당시 그 사람의 지위를 상징하는 옷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졌다는 것은 엘리사를 자신처럼 선지자로 세우겠다는 상징적인 행동인 겁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누구인지 왜 그가 그의 겉옷을 자신에게 던졌는지 바로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결단을 내립니다. 따라 가야지! 따라 가리라!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소 두마리를 잡아 백성들에게 나눠줍니다. 따뜻함이 있는 거예요. 부모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심이 있는 거예요. 그러고는 소의 기구를 불사르고 엘리야를 따라 나서죠. 다시 돌아서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겁니다.
별것 아니어 보이는 이 행동은 그러나 당시의 엘리야의 형편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따라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겨루어 대승을 거두고도 이세벨에게 쫓겨 호렙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엘리야를 따라 나서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어디 좋은 곳에 취직해서 호강하러 가는 길이 아니라, 가난과 고난과 위험이 예상되는 어려운 길이라는 겁니다. 그 길을 엘리사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따라 나서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무슨 욕심을 부립니까.
좋은 것 놔두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뛰어드는 사람들은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심, 그런 것 없습니다. 그거 정말 오해입니다. 오지로 선교를 떠나는 선교사님들, 가난을 각오하고 음식을 나누며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목사님들, 이런 분들이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냥 부르시니까 하는 거예요.
이제 시간이 흘러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승천하기 직전인거죠. 엘리야가 길갈을 떠나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또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마지막 여정을 떠납니다. 엘리사가 그 마지막 여정을 따라나서죠. 자신을 따라나서는 엘리사를 스승인 엘리야는 머물러 있으라고 따라오지 말라고 만류합니다. 열왕기하 2장 2절의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
왕하 2:2
길갈에서 벧엘로 갈때도,벧엘에서 여리고로 갈때도,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갈때도 엘리야는 똑같이 만류하고 엘리사는 똑같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스승인 엘리야는 왜 자꾸 따라오는 엘리사를 말렸을까요? 왜 따라오게 그냥두지 않았죠? 몰라요. 모릅니다. 엘리야가 왜 그랬는지 선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성경학자들도 의견이 너무 많이 나눠집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따라나선 엘리사의 행동. 얼핏 보기에 고집불통 같은 엘리사의 행동. 스승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기 맘대로인것 같은 불손해 보이는 엘리사의 행동은 성경구절을 통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 벧엘에 이르렀을 때, 또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
왕하 2:3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엘리야가 승천할 것이라는 사실을 선지자의 제자들이 들은거죠. 신난겁니다. 빅이벤트인 거예요. 들뜬겁니다. ‘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이렇게 들뜬 제자들을 향하여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왕하 2:3)
여기서 ‘잠잠하라’ 라고 쓰인 “하샤” 라는 단어는 움직이지 마라, 가만히 좀 있어라, 조용히 해라 라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예를 들면 어떤 가까운 분들이 또는 가까운 친구가 크게 다쳤다, 안좋은 일이 있다 하는 소식을 전화로 들은 거예요. 슬픔이 확 밀려오죠. 그런데 옆에서 철없는 아이들이 떠들어 대고, 뛰어다니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아, 좀 조용히 해봐. 아, 좀 가만히 있어라’. 지금 엘리사가 그러고 있는 겁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에게는 그저 엄청난 이벤트 같은 엘리야의 승천이 엘리사에게는 사랑하는 스승을 떠나 보내는 이별의 안타까운 순간인 겁니다. 고집불통으로 보일 수 있는 엘리사의 행동이 사실은 내가 내 사랑하는 스승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사랑의 행동인 겁니다. ‘떠나지 않겠다’ 라는 ‘그와 끝까지 동행하겠다’ 라는 신념인 겁니다.
강한 신념은 고집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사랑과 선한 의지가 녹아 있기에 고집과 강한 신념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집은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지만 강한 신념은 나와 남을 함께 살리는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를 고집불통의 선지자로 보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제 요단강에 이른 엘리야와 엘리사가 마지막 대화를 나눕니다.
..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왕하 2:9
얼핏보기에 욕심많고 뻔뻔해 보이는 이 구절의 엘리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서, 스승을 뛰어 넘는 명성을 얻고싶다는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갑절이나로 번역된 히브리어 ‘피 쉐나임’ 은 두 배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주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유산을 넘겨줄때 장자에게 두배의 몫을 주었는데 그때 쓰는 말입니다.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에게 자기가 엘리야의 장자로서 그의 사역을 이어가겠다는 소원을 말하는 겁니다. 자기가 엘리야의 그 능력의 사역, 그 귀한 사역, 그 어려운 사역을 물려받겠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제 승천하는 엘리야를 바라보면서 엘리사가 소리쳐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하며 엘리야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엘리사를 욕심많고 뻔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오해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후,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이별을 슬퍼합니다. 그러고는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 그의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을 치며 여호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러자 요단강이 갈라지고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이름을 가진 엘리사가 엘리야와 함께 건너 갔던 요단강을 이제 거꾸로 홀로 건너 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여호수아가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계승한 후에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엘리야의 사역의 능력이 엘리사의 소망처럼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통하여 온전히 엘리사에게 계승되어진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를 이어 타락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계승한 엘리사는 두 가지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첫번째 기적은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의 승천 후에 여리고라는 성에 머무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온 나라가 바알을 섬기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여리고 성읍의 사람들은 엘리사를 ‘아도니’, ‘나의 주님’ 이라고 부르면서 성읍의 나쁜 수질로 인한 고통을 엘리사에게 전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열왕기하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왕하 2:20
새 그릇도 소금도 정결함을 상징합니다. 엘리사가 그 정결함의 상징물인 소금을 물의 근원에 던지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물을 고치십니다.
그 후에 엘리사는 벧엘로 올라가지요. 그런데 길가에서 작은 아이들이 나와서 엘리사를 조롱합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이렇게 놀리지 않습니까. 엘리사가 선천적으로 대머리였는지, 엘리야와의 이별을 슬퍼해서 머리를 깍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당시 대머리라고 놀리는 말은 저주받아서 문등병이 걸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심한 조롱이 섞인 말이었죠. 이 말을 듣자 엘리사가 이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그러자 수풀에서 암콤이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찢어 죽입니다. 자, 엘리사의 이 첫번째 기적들을 보면 뭔가 기분이 좀 찜찜하지 않습니까. 아니 ’아도니 나의 주님‘ 이러고 오면 수질도 개선해주고 대머리라고 놀리면 아이들이고 뭐고 죽여 없애나요? 아니, 선지자는 그만두고 우리들도 누가 외모 가지고 놀리면 기분은 나쁘지만 옹졸하다는 소리 안들으려고 보통은 그냥 참아 넘기고 하지 않나요. 엘리사는 귀에 단 소리나 좋아하는 옹졸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럴리가 없습니다. 엘리사를 옹졸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와 그의 사역을 오해하는 겁니다. 열왕기하 2장 21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왕하 2:21
물은 생명의 근원을 표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생명의 근원을 정결함으로 고치시니까 다시는 죽음과 열매맺지 못함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근원부터 썩어서 열매 맺을수 없는 죽음의 자녀들에게 정결하신 예수가 새로운 생명수의 근원이 되심으로 다시는 죽음과 열매맺지 못함이 없어짐과 같이 엘리사의 첫 사역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를 놀리다 죽은 아이들이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원어를 보면 이들이 아주 어린 아이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12살에서 15살쯤 된 아이들인 거죠. 천지 분간을 못하는 아주 어린아이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뭔가 알기는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아이들의 나이는 하나님을 듣고 보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우상숭배의 근원지였던 이곳 벧엘에서 이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인 엘리사를 조롱하는데 ‘대머리여 올라가라’ 는 말은 엘리야의 승천까지 포함해서 놀리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엘리야를 승천 시키신,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것은 자신을 놀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엘리사의 옹졸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에 대한 엘리사의 선한 분노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한 엘리사의 첫 사역은 구원과 심판을 상징하는 사역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를 단순히 옹졸하고 잔인한 선지자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오해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이처럼 쉽지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의 온전한 이해와 적용을 위하여 진리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함이 맞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성경을 오해없이 바르게 이해하시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항상 차고 넘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