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열왕기하 18장 5-7절 ]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열왕기하 18:5-7
시대를 넘어서 기억이 되는 좋은 왕, 훌륭한 왕들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건 한 나라의 왕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지요. 좋은 왕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도 하고 나쁜 왕이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좋은 왕은 누구입니까. 머리에 딱 떠오르는 왕이 있으십니까. 그렇죠, 뭐니뭐니 해도 세종대왕이죠. 우리가 읽는 한글 성경, 그분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지금까지 한자로 된 성경을 읽었을줄도 모르죠.
그 많은 한자들.. 정말 외우기 어렵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30년 전 쯤 법대 전공서적을 보면 거의 절반이 한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 하나를 지명해서 이 책을 읽으라고 하죠. 근데 어떤 학생들은 못 읽어요. 모르는 한자들이 너무 많은거지요. 아주 진땀을 뺍니다. 그러니, 한글이 없었다면 성경을 이해하고 읽는 것 조차도 참 어렵지 않았겠습니까. 한나라의 왕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애를 쓰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덕을 보는거지요.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 중에서 기억나는 왕은 누가 있을까요. 다윗왕, 솔로몬왕. 사울왕도 유명하지요. 우리가 지난번에 함께 나누었던 여호사밧, 여로보암, 아합왕 등 이렇게 많은 왕들은 왕인 이유로 자신 개인의 인생만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며 살아갔습니다. 어떤 왕은 좋은 영향력을, 어떤 왕은 나쁜 영향력을 끼치고 살다 갔습니다.
오늘은 그 많은 왕중에 참 좋은 왕, 참 좋은 사람 히스기야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좋다 나쁘다의 기준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 나쁘다는 것이겠죠.
히스기야 왕은 남유다의 13대 왕으로 아하스의 아들이었고 25살이라는 청년의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가 강하게 하신다’ 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히스기야는 비록 변변치 못한 왕 아하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여호와는 아버지시다’ 라는 뜻의 아비야, 히스기야의 어머니죠, 그리고 ‘여호와께서 기억하심’ 이라는 뜻의 스가랴, 히스기야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아서 악한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선한 왕이 될 수 있는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25살에 왕이 된 청년 왕 히스기야는 무엇을 합니까. 종교 개혁을 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열왕기하 18장 3-4절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조금 이상하지요. 아세라 목상이나 바알을 제거했다고 하면 ‘아, 우상을 없앴구나..’ ‘종교 개혁을 했구나..’ 라고 보이지만 산당이나 놋뱀을 부순게 왜 종교개혁이라는 건가요.
기브온 산당에는 하나님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고 그 유명한 왕 솔로몬은 이곳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지 않습니까. 선지자 사무엘이 산당에서 제사지내는 장면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던 산당, 그게 왜 개혁의 대상이 되는겁니까.
또 놋뱀은 뭡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땅을 둘러 행하여 가다가 힘드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러자 광야에서 불뱀들이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가 하나님께 자복하며 구원을 요청하며 기도하죠. 잘못했다고 살려 달라고. 하나님이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셨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은 그걸 보고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놋뱀입니다.
때에 맞추어서 섬김과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 산당과 놋뱀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은 솔로몬을 쓰셔서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던 성막은 이제 산당이 아닌 이 성전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인데 (신12:5),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던 습관을 못버리는거죠. 계속 산당을 찾아 갔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그 산당에 풍요의 신이라는 우상 바알을 두고 함께 섬겼습니다.
놋뱀은 또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불뱀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 놋뱀을 없애지 않고 가져가니까 이게 마치 부적과 같아졌습니다. 병을 고치는 부적같이 된 것이지요. 온전한 의미를 상실한 겁니다. 원래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공간과 물건은 오히려 본질을 흐리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은 찢어져 내렸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직접 만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러기에 공간으로서의 성전, 공간으로서의 예배당은 의미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공간인 성전, 공간인 예배당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오셔서 내 안에 머무시는 이유로, 예수를 믿는 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수천년동안 카톨릭 교회를 넘어서 개신교까지도 장소인 예배당에 집중합니다. 성전이 된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로 보지 않고, 장소인 예배당을 교회로 봅니다. 게다가 이제 웅장한 예배당 건물은 성공한 교회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기복신앙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산당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섬긴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풍요를 돈을 함께 구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제가 어렸을 적에 차를 샀는데, 얼마나 좋든지요.. 조그만 상처라도 날까봐 애지중지 했습니다. 그래서 뭘했는지 아십니까. 십자가 장신구를 사서 달았어요. 안전하게 잘 지켜달라고. 이게 부적하고 뭐가 틀립니까. 예수님의 보혈피,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가 드라큘라나 쫓고 사고나 막는 부적이 된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들을 우리는 쉽게 못합니까. 왜 틀린걸 틀렸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까. 불경스러워 보이잖아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같아 보이잖아요. 오해의 소지가 있잖아요. 아무 생각없이 계속 해오던 일이 잖아요. 그래 손을 못대는 거예요.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아래에서 올곧은 사람이었기에, 정직한 사람이었기에, 참 좋은 사람이었기에 과감하게 이 일을 해 냈습니다. ‘아닌 건 아니야’. ‘틀린 건 틀린거야’. 부적처럼 전락한 놋뱀을 보며 느후스단, ‘저건 그냥 놋조각이야.. 아무런 힘이 없다고’ 그렇게 선포하며 나아갔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렇게 올바른 믿음의 신앙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열왕기하 18장 5절
자 이 정도 되면, 히스기야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우리 흔한 말로 꽃길만 걸었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은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함께 하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7절).
그러나 이 말은 히스기야왕의 삶이 마치 무풍지대에 서 있는 것처럼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뜻은 아닐겁니다. 히스기야왕 6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초강대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맙니다. 비록 남북이 갈라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 입장에서도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겠죠.
현재 이라크 북쪽에서 일어났던 나라 앗수르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잔인하게 적들을 착취하고 살육하는 무시 무시한 나라였습니다. 훗날 바벨론에 의해 이 앗수르가 망할때까지 근동 지방에서 이들의 존재는 공포요, 불안함의 대상이었어요.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나서 8년후 앗수르는 이제 남유다를 공격해 옵니다. 그 당시 앗수르의 왕은 산헤립이었어요.
자 그렇다면 이순간 참 믿음좋은 히스기야왕은 어떻게 했을까요. 히스기야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뭡니까. 기도 아닙니까, 기도.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요? 열왕기하 18장 13-16절은 그 당시 히스기야왕의 행적을 사실 그대로 적어놓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열왕기하 18장 13-16절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이 뭡니까. 참 실망스럽죠. 기도의 왕 히스기야가 위기앞에서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위기를 넘어서려고 애쓰고 있죠.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인데도 이렇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 아닙니까.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히스기야가 위기를 넘어 섰습니까. 은금을 받은 앗수르는 유다를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천지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수 있다고 하면서, 위기와 어려움앞에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를 앞세우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교만함의 쓴 뿌리를 드러내는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결국 앗수르의 대군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옵니다. 이미 유대의 모든 견고한 성들은 점령당했고 이제 예루살렘만 남은 상황. 정말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앗수르군의 수장들은 갖은 비방과 위협으로 항복을 종용합니다. 그들은 히스기야를 비방하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세상의 잡신으로 취급하며 조롱했습니다.
어설프게 사람의 방식으로 대처해 나가던 히스기야 왕이 정신이 바짝들었습니다.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신의 은과 금으로 문제를 풀려하던 히스기야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앗수르 산헤립왕의 신하 랍사게가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분노함으로 옷을 찢으며
슬픔으로 베옷을 입으며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이사야에게 이제 거의 다 망하고 얼마 남지않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열왕기하 19장 1-2절의 말씀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열왕기하 19장 1-2절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둘려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자 그렇다면 이제는 앗수르의 공격과 협박이 멈췄을까요. 아니예요. 계속 됐어요. 그러나 히스기야의 기도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려움 앞에서 기도하는데 매달려 간구하는데 변화가 없다면 더 어려워 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보통 나오는 말은 이렇겠지요. ‘에이, 기도해도 다 소용없어. 에이, 기도해봤자 바뀌는 것 하나도 없어. 에이, 하나님이 내 인생은 관심없나봐. 에이, 하나님이 안계신것 아니야. .’ 그러나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앗수르왕이 보낸 협박편지를 들고 성전에 올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습니다. 천지 만물의 심판자되신 여호와 앞에 그들의 죄의 증거를 펼쳐 놓습니다. 그러고는 기도하죠.
하나님,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 편지를 보세요. 그들이 마치 하나님을 우상취급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마치 잡신 취급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소서.
그리하여 온천하 만국에 오직 여호와만이 홀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주소서.
나 좀 살려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 이게 아니라, 그렇게 절박한 순간에 ‘주여,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 와중에 기도한 것 자체도 대단하고, 그 와중에 기도한 내용도 대단하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으셨어요. 밤사이에 천사를 보내사 앗수르 군사 18만 5천 명을 쳐서 죽이십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산헤립 왕이 니느웨로 돌아갔지만 앗수르의 우상 신전에게 기도하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한자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자 그렇다면 기도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히스기야는 어땠을까요. 잘 살았을까요? 아니죠.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열왕기하 20장 1절
다시 한번 죽음의 위협앞에 선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세상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이때 히스기야의 나이는 죽기에는 너무 이른 39살 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를 회복시키십니다.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키십니다. 이 구절들로 인하여 우리는 히스기야를 생각하면 응답받는 기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을까요?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착한 일을 많이 한다음 기도해서 들어 주셨을까요? 히스기야가 울면서 기도해서 들어 주셨을까요? 히스기야의 기도가 누구보다 간절해서 들어 주셨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 히스기야를 본받아 기도하세요. 그래야 응답받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렇다면, 누군가의 기도는 눈물이 부족해서, 누군가의 기도는 간절함이 부족해서, 누군가의 기도는 정성이 부족해서, 응답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건 맞는 말이 아니지요.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한 개인의 노력과 그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아주 위험한 착각일 뿐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열왕기하 19:34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유다를 구할 때에도, 병든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할 때도, 여호와 하나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열왕기하 20장 6절).
이게 무슨 말이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심의 이유는 그 간구함이 그저 기특해서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유익하기 때문이요,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이루어 갈 구속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나가는데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응답하심의 이유가 한 개인의 유익과 소망성취가 아니라, 어느 누군가가 기도를 너무 열심히 잘해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데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인거죠. 비록 히스기야의 기도는 충분히 훌륭한 기도였다고 해도 그 기도 자체의 충분함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이유를 충족시킬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응답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의 당사자였던 히스기야 조차도 하나님의 응답하심의 참의미를 잘 알지 못한채, 신앙적 교만함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기적을 경험하며 응답받은 히스기야는 세상적인 교만함은 진작에 이겨 냈었지만 신앙적인 교만함에 빠져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이 이루어낸 것인양 자랑을 했습니다.
바벨론왕이 히스기야의 병문안을 위해 보낸 사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보이며 자랑을 한거죠. 그 결과 훗날 유다는 바벨론을 통하여 멸망하지 않습니까.
내가 갖고 있는 믿음.
내가 해 온 신실함
내가 아는 성경지식들.
내가 드리는 기도의 경건함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받은 보물인데 그것을 마치 자신이 얻어낸 것인양, 자신이 이루어낸 것인양 교만함에 빠져 자랑하며 뽐낼때에 기쁨은 변하여 슬픔이 되지 않습니까.
참 좋은 사람 히스기야.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히스기야. 기도의 사람 히스기야. 그러나 신앙적 교만함 앞에서 넘어진 사람 히스기야를 보시며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를 다시 한번 검토하시는 좋은친구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