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 사무엘하 19장 1-4절 ]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사무엘하 19:1-4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본문의 배경은 압살롬의 반역 사건입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은 황급히 예루살렘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전력을 정비하여 압살롬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는데, 다윗은 자신의 장수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는 말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부하 장수 요압은 다윗의 명을 어기고 후한을 없애고자 압살롬을 죽이고 맙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과 다윗이 슬퍼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슬픔
전투가 벌어진 날 다윗은 친히 나가서 싸우려고 했지만, 다윗의 장수들은 적들이 노리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다윗왕인 만큼 다윗은 출정을 하지 말고 성에 머물기를 간청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에 머물며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장의 소식을 들고 오는 전령을 맞이했을 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어떻게 되었는지부터 물어봅니다. 이에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루로 올라가서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며 크게 슬퍼합니다.
[사무엘하 18:33]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8:33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내 아들 압살롬아”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까지 말하면서 또 다시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며 울었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슬픔에 대한 백성들의 불편함
그런데 오늘 본문의 표현 가운데 상황에 맞지 않는 어색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2,3절을 보면, 승리가 슬픔이 되었고,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도 마치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가듯 성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승전가를 부르며 기뻐해야할 상황에서 백성들은 슬퍼하는 다윗 때문에 그 기쁨을 표현할 수 없었고, 마치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참 불편하고 억울하며 자괴감마저 들었을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황급히 예루살렘 성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순간 누구 편에 서야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정황은 압살롬에게 유리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을 것입니다. 실제 이날 전투는 죽은 사람이 2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매우 치열했습니다.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승리하고 돌아온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은 다윗의 슬픔 때문에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도 된 기분을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군대를 이끈 요압 장군은 본문에서 이어지는 5,6절에서 다윗
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9:5-6]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9:5-6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요압은 다윗의 슬픔은 다윗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고 있으며, 압살롬과 싸우다가 압살롬이 아닌 요압 자신이 죽었다면, 그렇게까지 슬퍼하시겠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는지 모르겠으며,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이해하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한 백성들 앞에서 그렇게 크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는 다윗의 행동이 좀 너무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어 마땅한 자 압살롬
더군다나 압살롬은 백성들이 볼 때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해하려고 했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백주 대낮에 겁탈한 패륜아였으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상대로 반역을 일으킨 국가의 대역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죽인 사람들을 우리는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라고 합니다. 패륜 범죄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며 엄한 벌로 다스려졌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조선의 가장 훌륭한 왕을 꼽으라면 단연 세종대왕이라고 할 것입니다. 세종대왕 시대에 백성들의 윤리의식을 높이기 위해 ‘삼강행실도’라는 책을 편찬합니다. 그 책을 편찬하게 된 계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언 패륜범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세종과 대신들이 조정에서 이 사건을 다루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 세종은 유교의 도덕사상의 기본이 되는 삼강오륜을 백성들에게 더 철저히 가르쳐서 다시는 이러한 패륜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책을 편찬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의 15대 왕이었지만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도 탄핵 사유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비시킨 패륜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광해군의 업적을 좋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탄핵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패륜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압살롬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반역죄인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반역죄는 과거와 현재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큰 형벌로 다스리는 죄입니다. 특히 다윗의 경우 자신의 죽이고자 혈안이 된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몇 차례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해할 수 없다면서 사울을 살려주었던 반면, 압살롬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을 부어 왕을 삼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해하려고 했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을 따랐던 모든 백성들 앞에 압살롬은 죽어 마땅한 자였으며, 그런 그와 그를 따르는 반역의 무리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그들 모두에게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슬픔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기쁨을 누리기보다 오히려 주눅이 들고, 수치심과 자괴감마저 들게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슬픔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마음
이러한 백성의 마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윗이 그토록 슬퍼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까닭은 압살롬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격한 슬픔의 표현은 그가 압살롬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앞에서 읽었던 18장 33절 말씀에서 다윗은 슬퍼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다윗은 자신이 대신하여 죽고 싶을 만큼 압살롬을 사랑했습니다. 죽어 마땅했던 패륜아이자 대역죄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죽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압살롬과 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사람들은 법으로 죄의 경중을 나누고, 그 처벌도 달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죄의 경중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안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영광을 누리기 위해 선악과에 손을 댄 순간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세우려는 반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의 대가는 죽음 밖에 없습니다.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은 다윗이 압살롬을 생각하며 크게 슬퍼하듯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역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도 다윗과 같이 우리를 향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고 싶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윗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며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였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하십니다. 왜냐하면 비록 죄인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그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까닭은 그 사람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선교사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없이 차별과 천대받고 살았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그들을 그 이름으로 불러주었습니다. 누군가 자신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 것은 그만큼 그 자신에게 아들 압살롬이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이사야 43:1]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우리 이름을 부르며 내 아들, 내 딸 아무개야 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파하고 슬퍼할 때, 외로움과 고통속에 있을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역죄인이자 패륜아인 압살롬을 향해 다윗의 슬픔은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자괴감이 들게 할 정도로 격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윗의 그러한 격한 슬픔을 보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실제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에게 우리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하며,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며, 이번 한 주도 기쁨과 위로와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