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사무엘하 12장 1-7절 ]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사무엘하 12:1-7
잊을만 하면 나오는 유명인사의 간통이나 성매수 성추행 사건은 그러련 하면서도 늘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만듭니다. 또! 또 그랬어..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이런 소리가 나오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재벌이 벌이는 성매수 행위. 존경받는 정치인이 벌이는 성추행 사건. 믿고 따르던 목회자의 간통등은 진정 세상적인 성공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저는 안 올라가봐서 모르겠는데, 정말 그 위에서 보이는 건 성적쾌락밖에 없을까요. 다 가지고 나면 그것밖에 안보일까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이 일이 황당하게도 성경에 나옵니다.
원래 성경속에서는 사람들의 성적인 타락에 대해 광범위하고 자세히 다루고 있죠. 사람들이 저지르는 많은 종류의 죄 중에 성적인 죄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로 죄에 민감한 성경이 성적 타락을 다루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성경속에 마치 믿었던 목사가, 마치 존경했던 정치인이, 마치 부러워했던 부자가 그런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 예수님의 계보에 대표되는 인물의 성적 타락을 소개하는데 그의 이름은 놀랍게도 다윗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상대한 여성의 이름은 밧세바이죠.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2
다윗이 저지른 죄의 시작을 알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기지 않습니까.
다윗은 왜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나지? 아침에 일어나야 되는게 아닌가? 전쟁이 일어났는데 왜 다윗은 지금 왕궁에 있나? 전쟁이 끝났나?
얼핏 보기에 ‘잠에서 깨어 기지개 피며 바람을 쐐던 다윗이 우연히 밧세바를 보고 반했다’ 라고 해석하기 쉬운 이 구절은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자신은 한가로운 다윗. 아침 일찍부터 기도하며 계획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곤고히 세우기 위해, 현재 벌이고 있는 전쟁을 승리하기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데도 낮잠이나 자고 여기 저기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개념없는 다윗. 남 목욕하는 것이나 보고 설레이는 주책맞은 다윗의 망가지고 나태하고 게으른 영적상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기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죠? 도망자 다윗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사울을 피해 그는 오랜기간 눈물과 고통의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를 놓지 않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결국 다윗은 유다의 왕,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는 견고해지고 강성해지고 적들과의 전쟁에서는 백전 백승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골리앗의 검 한자루 챙겨 간신히 달아나던 다윗이 한나라의 왕이 되었고 칼과 창과 방패가 넘쳐나는 강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마른 빵조각, 물 한모금이 아쉽던 다윗이 먹고 마심에 부족함이 없어졌고, 혼자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다윗이 많은 아내들과 많은 자녀들 사이에 풍성함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성은 그 순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렬함.
성령님에 대한 뜨거운 감동.
주님의 일을 감당할수 있다는 말할수없는 기쁨.
이 모든 영적 열정이 식는 순간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 유혹의 열매가 눈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삶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변하는 겁니다. 벌거벗은 밧세바를 바라보며 다윗도 따라 벌거벗으며 수치스러운 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 6:13-17
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풍요로움에 취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벗어버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흔적을 남기죠.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11:5
이 흔적을 없애려고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 죽여 없애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당히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죠.
그냥 어느날 별 생각없이 긴장을 풀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서부터 생긴 이 일이 간음하고, 간통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살인을 하는 죄의 패키지를 만들어내고 만 것입니다.
딴 사람도 아닌 다윗인데 딱히 죄를 지을 계획을 한 것도 아닌데 누구라도 넘기 어려운 아름다움에 잠시 취했을 뿐인데 죄는 이렇게 옵니다. 전혀 요란하지 않게,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성령의 뜨거움이 없는 그들에게 그렇게 죄는 다가옵니다.
왜 다윗은 요셉과 같지 못했을까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앞에서 아무도 보는 자가 없는데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세기 39:9)” 하며 유혹을 넘어선 바로 그 요셉처럼 행하지 못했습니까.
성공에 취해서, 승리에 취해서, 풍요에 취해서 순간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잊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일탈을 일컫는 ‘밧세바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는 수치스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를 져놓고도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죄를 전혀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했죠. 분명히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11:27)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도 다윗의 회개는 보이질 않습니다.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던 다윗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단절이 이루어진 겁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단절시킵니다. 죄 지은자가 받는 가장 큰 징벌은 생명되시는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한복음 15:5-6
어찌보면 수 없이 죽음의 위기를 넘어온 다윗이 맞이한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될 위기.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죠. 나단은 자신에게 많은 양과 소가 있으나 가난한 자의 오직 한마리 있는 어린양을 빼앗아 자신의 손님을 대접한 악한 부자의 이야기를 다윗에게 들려줍니다. 자신의 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다윗이 이 이야기를 듣고 펄쩍 뛰죠. 그 악한 부자는 반듯이 잡아 죽여야 한다고 핏대를 올려가며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주제 파악을 못하는 다윗에게 나단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사무엘하 12:7-9
그러고는 나단은 이 죄로 인하여 다윗이 겪게 될 재앙을 예언합니다.
죄의 확인.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 앞에 다윗은 겸손히 무릎 꿇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죄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의 회개가 시편 32편과 51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요. 자신의 죄를 인정한 다윗은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
10 …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32, 51편
라는 간구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녀로서의 회복을 간절히 소망 합니다.
우린 때로 너무 미안해서 잘못한 줄 알지만 용서해 달라는 말도 못하지 않습니까. ‘아휴, 무슨 염치로 용서를 빌어. 뻔뻔스럽게’ 그러나 다윗은 매어달립니다. 잘못해 매를 맞으면서도 엄마의 품으로 울며 파고드는 어린아이와 같이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히 용서와 회복을 구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사무엘하 12:13
용서, 하나님께 용서 받음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죽지 아니하려니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요. 다윗이 그걸 안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런 긴장감이 있으십니까.
우리가요 완벽하지 않잖아요. 죄는 누구나 지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죄를 인식한 후 그 죄의 용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매달리며 회개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전혀 다릅니다. 보통은 이 회개하는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요. 저부터도 그랬어요. 살고 죽는 문제인데, 염치, 체면 따질 일이 아닌데, 그걸 모를때가 너무 많아요.
하나님께 매어달리고 간절하게 회개한 다윗은 용서를 받습니다. 물론 용서받음이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용서가 살고 죽는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죄를 짓고도 간절한 회개없이 슬쩍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다윗처럼 간절히 매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밧세바에게 얻은 아기는 심히 앓고 죽고 말지요.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훗날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가 솔로몬을 낳고 그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이 되지 않습니까.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분명 다윗의 영적인 나태함과 성적인 타락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징벌과 그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야기를 그저 성공한 다윗 한 개인의 성적타락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기에는 뭔가 좀 아쉽지 않습니까.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것 같지 않습니까.
만일 이 이야기가 성공한 한 남자의 이야기라면 다윗만큼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은 일어날 가능성도 없는 소설같은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일탈만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더욱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는데 여기서 “보니” 라고 쓰인 단어 “라아” 는 그냥 우리가 눈으로 보다라는 일반적인 단어입니다. 뭘 어떻게 하려고 뭘 찾으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무슨 계획을 가지고 뭘 알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심코 눈가는데로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의 시작이 되었다는 거죠.
인류 최초의 인물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바로 다윗처럼 하와가 그냥 그 열매를 보았고 보암직도 먹음직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광야에서 모래바람만 맞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무슨 일을 겪습니까. 보암직한 과수원, 보암직한 농경지, 보암직한 풀밭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그저 가나안 땅을 바라본거지요.
그러기에 다윗의 죄의 시작은 인류의 죄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다윗의 죄의 시작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모든 역경을 이기게 하시고 말할 수 없는 풍요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배신하죠.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며 아담과 하와에게 지상낙원을 선물하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배신하죠.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의 말을 듣는 영적 간통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에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내시고 결국 가나안으로 그 백성을 인도해 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가나안 땅의 우상을 따르는 믿음의 간통을 저지릅니다. 이처럼 다윗의 배신은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을 향한 배신을 상징합니다.
셋째로, 다윗은 자신의 죄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 “
이스라엘을 노예에서 풀어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애굽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안 온 나라의 장자를 치셨습니다. 이 공포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슬초에 어린양의 피를 묻혀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모면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우슬초는 어린양의 피와 연결됩니다. 어린양 예수는 아담과 하와로 부터 시작된 죄를 끊어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피는 우리 모두의 죄를 정결케하며 깨끗히 씻어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넷째로, 다윗의 죄는 한 개인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왕이었어요. 다윗이 율법을 어기고도 무사하다면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어떻게 믿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이제 막 태어난 순결한 아기를 다윗의 죄를 대신해 죽이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무엘하 12:14 의 말씀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사무엘하 12:14
‘그냥 그렇게 봐주는게 어디 있어요!’ 이런 소리가 없게 만드신다는 거죠. 모든 인간은 죄 앞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죄지은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한 거죠. 진짜로 우리가 착각하고 사는 것중에 하나는 내가 구원받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죠. 당연한거는요 내가 죽는게 당연한 거야요. 내가 지옥가는게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결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을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죽는게 맞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니까 그냥 봐줄께” 이러시는 것이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윗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밧세바를 통하여 난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건히 서는 모습을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왕자들 다 제쳐놓고 왜 하필 솔로몬입니까. 왜 하필 간통했던 여인의 아들입니까. 그러나 솔로몬의 등장은 하나님의 용서가 완벽함을 상징합니다. 예수 보혈피로 씻겨진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보시지도 기억하시지도 않으심을 상징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다윗의 많은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다윗의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성경속 다윗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해하시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가득 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