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사무엘상 24장 3-10절 ]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사무엘상 24:3-10
매년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것 이상의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는 매우 상업적인 일입니다. 큰 돈을 들이고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망하기 쉽상이죠. 그러기에 영화는 주제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소재를 영화속에 집어넣곤 합니다. 가끔 ‘이 장면이 왜 여기서 나오지?’ 하는 경우가 있지요.
매끄럽게 연결하지 못한 흥행 소재가 그런 부작용을 만들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 자주 사용하는 흥행소재중 하나는 바로 도망자 소재입니다. 영화의 장르를 막론하고 단골로 나오는 소재중 하나이죠. 잡힐듯 말듯 도망가는 장면은 영화의 재미를 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국에는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현실속에서 일어난 도망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탈옥수 신창원. 그 좁은 땅덩이 한국에서 서로 뭐하고 사는지 서로에게 아주 관심이 많은 나라 한국에서 장장 907일, 거의 3년동안 안잡히고 도망다닌 도망자였죠. 도망다니면서도 신창원은 105회나 강도와 절도를 저질러서 거의 10억원이나 되는 돈을 훔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워낙 흥미있는 일이다 보니 신창원을 응원하며 잡히지 말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도망자의 이야기가 선악을 망각할 정도로 우리에게 큰 관심을 끄는 이유는 쫓고 쫓기는 긴박감이 주는 긴장감을 사람이 즐기기 때문이죠.
얼마전 유튜브에서 어떤 영상을 봤는데 조회수가 150만건이 넘어요. 내용은 별거 아닙니다. 앞에서 사슴이 뛰고 뒤에서 그 사슴을 쫓아 늑대가 뜁니다. 그게 다예요. 그런데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걸 보는 겁니다. 쫓고 쫓기는 긴장감, 그것이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거죠.
그러나 이처럼 재미있는 추격 장면들은 관중의 입장에 있을 때만 재미있는 일입니다. 쫓기는 당사자는 말할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일입니다. 늑대를 피해 달아나는 사슴의 고통, 형사를 피해 달아나는 신창원의 고통. 거의 3년만에 잡힌 신창원이 뭐라고 심경을 밝힙니까? ‘편해요 그냥‘ 얼마나 도망다니는게 고통스러웠으면 잡혀가는 마당에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죄인인 신창원도 이런데 우리가 만약 아무 죄도 없이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울까요.
성경속에는 이처럼 죄도 없이 억울하게 10년동안이나 도망다닌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다윗입니다. 성경은 도망자 다윗의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간단하게 기록하고 말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 다녔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전할수 도 있는 이 이야기를 성경이 이토록 길고 자세하게 전하는 이유는 다윗의 도망자의 삶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삶의 일부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다윗의 도망자 이야기를 통하여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죽인 다윗은 순식간에 민족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백성뿐만 아니라 왕과 왕자도 다윗을 환영했지요.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무엘상 18:2-4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과 군장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는 요나단 자신이 인식하였던 그러지 못하였던 간에 자신의 왕권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후에 이스라엘로 불린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얻은 것과 같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권을 상속받았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힘으로 무력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요 정당하게 상속되었음을 밝히는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힘과 무력으로 얻어질 것이 아니요 정당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에게 상속될 것임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등장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시간동안 블레셋에게 받던 고통에서 벗어날수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전한 삶을 꿈꿀수 있었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울왕과 다윗을 마중나온 사람들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며 사울왕의 군대와 다윗을 맞이합니다.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며 이르되
사무엘상 18:6-7
여기 뛰놀다라고 쓰인 단어 “샤하크”는 어린아이들이 막 신이나서 장난을 치면서 천진난만하게 춤추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너무너무 신나서 다 큰 여인들이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춤을 췄다는 말씀입니다. 격조있고 웅장한 환영행사가 아니였단 말이죠.
그냥 모두가 너무너무 기쁜 겁니다.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체면이고 뭐고 중요하지가 않았어요. 다윗의 승리의 입성과 백성들의 환호하는 모습은 마가복음 11:7-10 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7-10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반기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질투심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노랫가사에 다윗을 향한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사울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함으로 치닫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멈출수가 없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 성령의 도우심을 잃는다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일인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마라, 나쁜 짓을 하지 마라, 음란함을 피해라.. 라고 자꾸 권면하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라 이런 말이 아닙니다. 죄는 죄 자체도 문제이지만 소소한 죄라도 그것이 나의 삶에 자꾸 채워지면 성령님과 자꾸 멀어지는 겁니다. 악함을 즐기며 성령님과 교제할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자, 이제 사울왕과 다윗은 죽이려는 자와 피하는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에게 대들지도, 싸우지도 않습니다. 천천을 죽이는 사울에 비해 만만을 죽이는 다윗의 전투력이 훨씬 뛰어났을텐데 기회를 엿봐서 얼마든지 맞서거나 죽일수도 있었을텐데 다윗은 사울왕과 맞서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가서 사무엘을 만납니다. 라마 나욧에서 사무엘은 늦게까지 자신을 따르는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지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 하나님과의 적극적인 교통이 있는 곳으로 다윗이 거처를 옮긴겁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무찌르고 백성들이 갖고 있던 죽음의 공포를 막아낸 후 사울왕과 맞서지 않고 피해 라마 나욧으로 간 것과 같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피해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피하신 에브라임과 다윗이 피한 라마 나욧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에브라임 땅 안에 라마 나욧이 있습니다. 다윗의 도피처가 예수님의 피하심을 예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라마 나욧에서 시작된 다윗의 도망자의 삶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도망가는 다윗의 여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요.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사무엘상 21:10
가드가 어딘줄 아시죠.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자신이 죽인 적장의 고향으로 사울왕을 피해 도망온 다윗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미친척하며 침을 흘림으로 목숨을 부지합니다. 얼마나 창피 했을까요. 그 수치스러움이 두고두고 기억나지 않았겠습니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다윗의 여정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둘람 굴로 헤렛 수풀로 그알라로 황무지 요새와 십 황무지 산골로 도망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죠. 십 황무지 수풀에서 아라바로 엔게디 요새로 엔게디 황무지로 들염소 바위 근처 굴로 바란 광야로 하길라 산지로 다시 블레셋 가드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시글락으로 그리고 헤브론으로.
수치스럽고 지루할정도로 오랜 다윗의 도망자의 여정은 다윗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순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체포 되셨습니다. 잡히신 예수님은 가야바의 장인이자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십니다. 안나스의 심문이 끝나자 이제 가야바 앞으로 끌려가 또다시 심문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는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선고한 그들은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립니다. 얼굴에 침 뱉으며 조롱하며 욕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동족이요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할수 없는 조롱과 고통을 받으십니다.
사형을 집행할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던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유대 분봉왕인 헤롯에게 넘기지요. 그러나 사형시킬 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한 헤롯왕은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 보냅니다. 군중의 요구에 밀려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형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입니다. 다윗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도망자의 삶은 예수님 잡히시던 밤의 수치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길을 보면서 우린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그냥 다 없애버리시면 안됬을까? 예수님은 왜 그냥 당하셨을까? 대제사장, 서기관들 산헤드린 공회, 예수님과 맞서는 그들 모두를 한번에 없애 버리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새 나라를 세우시면 되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것도 아니고 그저 소수의 사람들이었는데…
이 궁금증은 똑같이 다윗에게도 드는 궁금증입니다.
다윗의 고단한 인생은 어떻게 해야 해결될수 있습니까? 사울왕만 죽으면 됩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미워해서 그렇지, 다윗은 이미 온 이스라엘의 사랑을 받는 국민 영웅이었습니다. 그냥 사울왕이 문제인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속에서 다윗에게 사울왕을 죽일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번이나 찾아오지만 사울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가다가 어느 굴속에 숨었는데 사울왕은 그것도 모른 채 그 굴 속으로 볼일을 보려고 들어오지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볼일을 보려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보는게 관례였습니다. 사울왕도 예외는 아니었겠죠. 안전하게 볼일을 볼 요량으로 굴속으로 들어온거죠.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겉옷을 벗어서 옆에 잘 치워놓고 볼일을 보았을 겁니다.
사울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겉옷은 예수님을 죽이려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를 상징하고, 볼일을 보는 사울왕의 더러움은 유대 지도자들의 더러움을 상징합니다.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더러운 사울을 다윗과 함께 굴속에 숨어있던 다윗의 부하들이 보고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
사무엘상 24:4
우리는 성경속에서 이런 내용의 예언이 나오는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인가 분명히 이런 예언이 있었고 다윗과 그 부하들이 그 예언을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치 다윗이 지금 사울을 죽인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하들을 말리죠.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
사무엘상 24:6-7
여호와께서 금하시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 ‘할릴라’는 신성모독을 금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사울왕을 죽이는 것이 단지 사울왕이라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어 나오는 다윗의 말을 통해 그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사무엘상 24:15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재판장 되심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자에 대한 심판이 사람의 손에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급히 하나님의 주권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능력의 팔을 들으사 모든 대적자를 죽이지 않으신채 그저 고통의 길을 걸어가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예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래 하나이시나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십자가를 지셨기에 구원의 역사를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다윗이 사울왕을 죽였다면 무슨일이 일어 났겠습니까. 예수님을 예표하는 다윗왕이 선왕인 사울이 볼일보는 틈을타서 죽인 더럽고 치사한 인물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명예로움이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다윗이 사울왕을 죽였다면 당장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장인을 죽인 패역한 인물로 기억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이익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볼수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설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의 팔로 대적자를 치지 아니하시고 모든 심판과 구원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었기에 십자가를 지실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판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심판자 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