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데살로니가전서 1장 8-10절 =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 1:8-10
“유명한 교회, 이름난 교회” 이런 단어를 들으시면 여러분은 어떤 교회가 떠오르시죠? 소문난 교회, 잘 알려진 교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는 수많은 성도를 가진 대형교회이거나 담임 목사가 유명하거나 예배의 형식이 매력적이거나, 혹은 초대형 예배당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 그것도 아니면 한국의 새문안교회나 영락교회처럼 아주 오래된 교회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보고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전서 1:8
이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이 교회의 성도들은 어떠했기에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을까요? 그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참 신실하시네요”, “참 좋은 믿음 갖고 계시네요” 이런 평가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도대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마케도니아를 넘어서 주변 멀리까지 소아시아, 예루살렘, 시리아, 아라비아를 넘어 지중해 연안 여러곳까지 이렇게 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교회가 대형교회였기 때문일까요? 이 교회의 목사님이 유명하신 분이어서 설교를 너무 훌륭하게 하셔서 그래서 소문이 퍼졌을까요? 커다란 예배당에 엄청난 예산을 집행했기에 유명해졌을까요? 성경 본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주의 말씀이” 라는 말은 예수에 관한 말씀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그 메시지를 뜻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신 메시지는 뭡니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26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무슨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활이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 믿는 자에게 죽음의 정죄함은 없습니다.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57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사망을 이기고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주신 메세지, 복음, 즉 복된 소식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이 복음, 복된 소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복음을 혼자만 꽁꽁 싸매서 즐긴 것이 아니라 온세상을 향하여 크게 외쳤어요.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단어의 원어를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을 엄청난 나팔소리가 나는 것처럼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그렇게 요란하게 큰소리로 적극적으로 전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어, 저 사람들 왜 저래’ 이럴 정도로 복음에 꽉 잡혀서 뜨겁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소식이 세상에 퍼진 것입니다. 그래서 각처의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알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일입니까. 이 열정,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열정 아니겠습니까. 헛된 것에 붙잡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복음전파의 열정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복음 전파는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으로 증거되어 졌습니다. 말이 힘을 얻으려면 삶으로 증거되어져야 합니다. 말이야 누가 못합니까. 그러나 말한 대로 살아내는 것, 말처럼 살아내는 것은 정말 다른 일 입니다.
자,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살전 1:9
바울과 그 일행은 어떻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지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자, 만세전에 이미 선택된 이들은 그 복음에 뚜렷하게 반응했죠.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그 말씀에 반응합니다. 그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선교 여행을 다닐 때 어떤 이들은 분노하고 비판하고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 말씀으로 깨어나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씀 앞에 회개함으로 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말씀 앞에 섰을 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을 통하여 믿음의 시작인 회개가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존 칼빈은 “참된 회개란 우상을 숭배하던 죄악된 옛 생활로부터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라고 회개에 대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집중했던 이 구절,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구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함께 보기를 원하는 단어는 <우상>입니다. 헬라어로 ‘에이델론’, 영어로 아이돌스 (Idols) 는 형상, 모양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의 우상은 그러기에 보통 형상으로 표현되어졌습니다. 수많은 동상들 수많은 그림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죠. 데살로니가에는 어떤 우상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전통적인 그리스 로마의 신들, 제우스 같은.. 그리고 제국의 지도자를 신으로 여기는 우상들이 있었죠. 즉 헬라시대의 우상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안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국숭배 즉 시저와 옥타비아누스 등 사람을 신으로 생각해서 섬겼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디오니소스라는 생식종교가 있었습니다.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 디오니소스 신의 특징이죠. 그러다보니 데살로니가 지역은 성적으로 아주 심각하게 타락했습니다. 성적 타락이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그런 문화속에서 한 개인이 자라나고 성장해서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게 삶 속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남들도 다 그래..’ 라는 말로 다가오는 죄는요, 죄의식을 유발시키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던 또 하나의 토속종교는 카비루스 숭배 입니다. 일종의 데살로니가 지역의 수호신과 같은 종교인데요, 데살로니가 지역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이 신이 부활해서 자신들을 돕는다는 메시야 전승과 같은 우상숭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종류의 우상들, ‘그게 뭐가 나빠..’ 할 정도로 생활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우상들. 때때로 이 다양한 우상을 섬기며 벌이던 축제로 인해 지루한 일상을 깰 기쁨의 요소이기도 했던 우상들. 그것들을 데살로니가 교회가 버렸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어떤 우상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인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우상은 샤머니즘인 것 같아요. 무속신앙 이라고도 하지요. 너무나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어서 구분도 잘 안됩니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불교도 도교도 유교도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기복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떡하니 교회안에 들어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은 열심을 다해 신을 달래고 그래서 그 신의 힘을 빌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것인데, 그 결과 이러한 기복신앙은 기도의 본질, 예배의 본질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생명줄이자 호흡인데 어떤 이들은 이 기도를 기복신앙으로 이용하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 기도가 기복신앙 같아서 아예 하지를 못하고.. 그 피해가 정말 심각합니다. 또한 이 샤머니즘은 교회안에서 은사주의 또는 목회자 숭배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샤머니즘, 무속신앙은 의식이 있는 성도라면 그래도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이지요. 문제는 오늘날 우상이 더욱 교묘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십여년전 한 기독교 매체가 우상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뭐가 우상입니까?” 라는 질문에 물질 만능주의, 과학 만능주의, 쾌락주의, 그리고 사상, 신념, 철학등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답했습니다. 우리도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 현대의 우상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한 2년전 쯤, 미국의 한 기독교 매체가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우상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질문 내용은 똑같았습니다. “무엇이 우상입니까?” 그러나 대답은 조금 다릅니다. 편안한 삶, 안전한 삶, 돈, 인정받음.. 무슨 무슨 주의, 물질주의, 과학주의, 쾌락주의등 집단적인 주의가 아니라 편안하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게, 경제적인 위협없이 살고 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변함없는 돈에 대한 욕망.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 매우 개인적인 우상, 그것이 오늘날의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마틴 루터는 “당신의 마음이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그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다” 라는 말로 우상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앞에서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우상을 버림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인식과 후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서는 내 삶에, 내 영에 다시 죄가, 다시 우상이 들어옵니다.
누가복음 11장 24-26절의 말씀입니다.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눅 11:24-26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복음을 들음으로 내 죄를 보고 내 악을 보고 그 더러움을 내어버리며 청소하고 수리된 내 집에, 무엇을 담아야 합니까. 그곳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그저 모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주인으로 삼아야 합니까.
나의 하나님. 살아계시고 참되신 나의 아버지. 그 하나님이 청소된 그 자리, 더러운 것을 버린 그 자리에 주인되셔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듯,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옵니다‘ (찬280)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의 모든 우상을 아낌없이 버려두고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을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회개가 일시적인 후회와 탄식, 일회적인 회개가 아니라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반복적이고도 지속적인 회개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악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들에게 무엇이 보였을까요? 마치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던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돌아선다면 무엇이 보일까요? 세상욕심. 편안한 삶. 안전한 삶. 돈. 인정받음이라는 우상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다시 오실 예수가 보입니다. 예수 재림의 소망이 생깁니다.
우상을 떠난 주의 자녀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의 계획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성장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의 다시 오심, 예수 재림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선명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이 예수의 재림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나의 온 영이 선명하게 인식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돌아온 결과인 복음의 열매는 예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여러곳에서 요리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죠. 아주 최고의 실력을 가진 요리사들이 ‘어, 어디 저런 음식이 있지?’ 하는 요리를 만들어 냅니다. 자 우리가 어느날 요리 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한 요리를 티브이 화면을 통해 봤다고 칩시다. 파를 쓸고 고기를 다듬고 생선을 튀기고 야채를 찌고 엄청난 실력으로 요리하는 요리사의 모습이 참 놀랍습니다. 아 무슨 요리를 만들려고 저러는걸까 궁금하겠죠. 그렇게 한참을 보아서 결국 요리가 완성됩니다. 정말 보기에도 어마 어마한 요리가 나왔어요. 사람들이 맛을 보고 입을 다물지를 못합니다.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 요리가 일등한 요리예요.
그런데 어느날 내가 친구들하고 같이 어느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거기 그 요리사가 있는 거예요. 집주인이 특별히 그 요리사를 모신 거예요. 우리를 대접하겠다고.. 나는 첫눈에 그 요리사를 알아봅니다. 봤쟎아요, 요리하는 것. 무슨 요리를 해줄건가 보고 있는데, 바로 그 일등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같이 간 친구들은 그 요리사를 몰라요, 그 요리사가 요리하는 것을 본적이 없어요, 요리경연대회 우승자라는 것을 몰라요. 당연히 무슨 요리가 나올지도 모르죠. 그래서 별 기대없이 떠들고 자기들끼리 놉니다.
하지만 나는 압니다. 무슨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나는 기대합니다. 내가 무엇을 먹게 될지.. 나는 상상합니다. 내가 먹게 될 그 요리의 맛을.. 그래서 나는 그 요리사의 손놀림에 집중하면서 그 음식이 완성되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지식이 장성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완성, 예수 재림을 기대합니다. 예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회심의 결과를 예수 재림의 기다림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10
마지막 날이 되면 무슨 일이 있습니까.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계 20:11-15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장래의 노하심입니다. 그러기에 그날은 믿지 않는 자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영원한 멸망의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예수가 우리를 건지심으로 구원의 완성에 무사히 도달합니다.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8-39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시작된 우리의 구원은 예수의 건지심으로 예수 재림의 그날에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이날은 성도들의 기쁨의 날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으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 예수의 재림, 구원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의미를 너무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시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