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이인엽 목사

= 데살로니가전서 1장 4-7절 =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4-7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얻는 사실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원래 나는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원죄 그리고 내가 살면서 지은 무수한 죄로 인하여 죽는게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고 예수님의 대속함의 은혜로 그를 믿는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거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참 은혜로운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선택이 창세 전부터 준비되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깊은 신학적 진리를 담은 이 말씀은 그렇다면 왜, 왜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 하셨는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6

거저 받은 자가 그 기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창세 전부터 선택하신 이유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랍고 감동스러운 일인 것이죠.

어떻게 나를 선택하셨을까.
어떻게 나같은 죄인을 선택하셨을까.
어떻게 영 죽을 내 영혼이 선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처럼 비천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그 귀한 자리로 부르셨을까.
이 감동이 여러분의 삶속에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결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하늘의 예배, 요한계시록 4 장에서 요한이 본 하늘의 예배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기이한 생물들이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립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 이에게 경배하고 …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

계 4:10-11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은 바로 이 하늘의 예배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선택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기 보다 하나님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사랑이 많으시다는 하나님이 왜 다 선택하시지 않고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는 거야?’ ‘사랑의 하나님이 맞나?’ ‘모두를 살릴만한 능력이 없으신 건가, 모두를 살릴만한 사랑이 없으신 건가..’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어떤 이들은 감사의 기도가 넘쳐나는데, 어떤 이들은 불평과 비판이 쏟아져 나옵니다. 똑같이 복음을 듣는데 어떤 이들은 감동의 눈물이 나는데 어떤 이들은 분노의 감정이 솟아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4

짧은 시간동안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복음을 듣고 그들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이미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택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선택받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선택.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는다.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나의 구원이 얻어진다” 는 이 사실은 연약한 나의 심정이, 악한 나의 수고가 구원의 초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받은 구원의 약속이 견고함을 보장합니다. 그 확실함 속에 깊은 감사가 넘치고, 예수를 닮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싶은 의욕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하는 선한 열심들이 솟아 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전한 그 복음이 단지 말이 아니라, 단지 화려한 수사학이 아니라, 단지 이야기꾼의 재미난 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들어있는 살아있는 생명이었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5

복음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헬라시대에는 많은 웅변가들이 있었죠.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또는 법정에서 또는 중요한 정치적 모임에서 이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웅변술을 발휘했습니다. 때로는 왕의 정책을 홍보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권익을 옹호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말을 잘하려고 배웠던 학문을 수사학이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는 철학을 기초로한 이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 그리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풍겨나오는 성품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 조절해서 말하는게 웅변가들의 일이었고 이것에 관한 학문이 수사학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요. 수사학자들의 말은 휘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렬하게 순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견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말이 하나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영생의 길로 견인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이신 성령, 그리고 그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복음전파는 단순한 웅변가의 수사학적 연설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철학, 사람의 감성, 사람의 인성에 기초를 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한번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1:5

본문의 구절을 원어를 기준으로 좀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전한 복음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았습니다.”

복음의 전도는 사람의 말솜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복음으로 전해지는 그 말속에 성령의 불이 뜨겁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미 태초부터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설교자의 복음전파를 통하여 만나는 순간, 뜨겁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산성 용액에 파란 리트머스종이가 붉게 변하는 것처럼, 선택받은 자들이 성령의 능력의 확신을 만났을 때 분명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반응, 그 변화는 절대 희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확신하는 자를 통하여 복음을 받은 자들의 변화된 모습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6

성도의 환난. 여러분은 어떻게 인식하십니까. 한동안, 특히 제가 어렸을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예수 믿으면 잘된다’ 는 거예요.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겁니다. 그 당시 새롭게 교회에 나가신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어려서 부자로 자랐고 그 옛날에 대학도 나온 여자분이었지만, 결혼 이후 남편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참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이 분이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삼중축복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잘했더니, 교회에 봉사를 잘했더니,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삶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질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된다, 예수 잘 믿으면 병이 낫는다, 그걸 그분은 믿었고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신 분들은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이 그랬습니다. 대분분 사람들의 처지가 전보다는 좋아지던 시절. 한국이 고속 성장을 하던 시절.. 그런데 정작 전도를 한 이 여자분은 남편이 더욱 더 사업에 망하고 아들이 원인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가뜩이나 어렵던 삶이 더욱 더 어려움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남편은 과음으로 인한 혈관파열로 죽었습니다. 자, 이 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수 십년동안 이 분은 예수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 분이 예수를 떠난 지 아주 한참만에 저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일년이 지났을까.. 이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복음을 오해했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저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성도의 삶. 어디 꽃길만 걷기를 기대합니까. 어디 박수와 영광만을 기대합니까. 예수는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리며 골고다언덕을 오르셨는데. 그 길을 따르겠다는 우리가 어디 뒤에서 룰루랄라 춤추며 걸어가길 기대합니까.

당신의 고난은
당신의 병듦은
당신의 눈물은
당신의 외로움은
당신의 좌절은
당신의 슬픔은
예수 생명이 당신의 삶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눈물흘리며 고개숙인 당신 곁에 있으신 예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6

이 구절에서 환난이라고 해석된 단어는 아주 지독한 압박을 말합니다. 엎친데 겹치는 고통을 말합니다. 포도를 짓눌러서 포도즙이 빠져나오는 그런 압박을 말합니다. 성도가 겪는 환란의 모습입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순간, 성도는 죄성이 가득한 세상과 분리되어집니다. 다른 모습을 갖게 됩니다. 세상이 그 다름을 알아보게 되지요. 세상은 자신들과 다른 그들을 미워합니다. 세상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는 밥도 같이 안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이민족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았던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과 같이,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가 세상속에서 그 다름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는 것, 환난을 당한다는 것,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더욱이 함께 모여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고난을 받았는데, 온세계에 흩어진 영적 이스라엘,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영적 이스라엘, 성도가 환난 가운데 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씀이지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으려 나섰지만 잡지 못하고 대신 바울을 통해 믿음을 가진 야손을 잡아 끌고 갔습니다. 예수를 믿자 마자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 집에 맞아 들이자 마자 야손은 잡혀가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예수 믿고 세상에서 잘 된게 아니라 예수 믿고 세상에서 환란을 만난 겁니다. 왜죠? 세상은 자신들과 다른 성도들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속에서 기쁨을 찾으나 성도는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받습니다. 세상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 사람의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좀처럼 알 수 없는 그 기쁨. 그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환난 가운데에서도 이 성령의 기쁨에 붙잡혀 말씀, 로고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깁니까. 우리가 어떻게 환난 가운데 기뻐합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누림으로 얻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기쁨. 성령이 주시는 기쁨에 붙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과감하게 세상 것을 떼어 버려야 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빌 3:7-9

누가 세상의 환난을 이길수 있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기쁨 가운데 예수를 얻은 자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자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이 바울의 삶을 본받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품은 그들이 예수의 삶을 본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삶이 성도의 삶을 대표하는 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7

마게도냐는 헬라지역의 북부, 아가야는 헬라지역의 남부입니다. 헬라 온 지역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삶이 본받을만한 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이 말씀들, 하나님의 선택, 선택된 자들의 마땅한 반응,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 그리고 환란을 이기는 성도의 삶, 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 귀한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함이 여러분 가운데 있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