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데살로니가전서 1장 1-3절=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1-3
2025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기간 중에도 새해의 시작은 참 무거웠지만, 올해도 참 마음이 무겁다, 이렇게 한해가 시작되네요. 한국 상황도 참 어렵고 미국 서부 LA지역의 산불도 그렇고 두루두루 무겁고 힘겨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힘을 내시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힘든 분들과 함께 기도하며 어려움에 처한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우심과 위로하심이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교회에서 지난 1년 넘게 갈라디아서 강해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여기 좋은친구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바울서신을 계속해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바 대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설교는 대표적으로 몇가지 형태로 나누어 지는데요, 그중에 하나인 강해 설교라는 것은 최대한 성경 본문을 직접 설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 방식입니다.
굳이 이걸 음식에 비교하자면, “아 참 맛있네, 이거 뭘로 만든거야?” 이런 음식이 아니고, “아, 이거 고등어 구이구나.. 아, 이거 한우 스테이크구나..” 하듯이 원 재료에 그저 소금만 살짝 뿌린 그런 음식, 이런 것이 강해 설교라 할수 있겠죠. 어묵과 같은, 탕수육과 같은 그런 음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말씀 자체를 사모하지 않고서는 조금 듣기 힘든 설교가 강해설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생고기를 나눠먹자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셔서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바울 서신의 순서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제가 최근에 살펴본 순서대로 갈라디아서 다음으로 데살로니가 전서, 후서를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데살로니가 전서를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1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반도 북동쪽에 있는, 그리고 에게해 앞에 있는, 좀 쉽게 생각하시면 인천 같은 그런 도시입니다. 그리스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수도이기도 했죠. 한적한 시골 마을이 아니라 아주 번창한 도시였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실루아노라고도 불리는 실라와, 디모데, 누가 등이 일행이 되어서 2차 전도여행이라고 불리는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누가는 빌립보 교회를 돌보기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일행들과 함께 방문한 도시가 데살로니가 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 17:1-2
이렇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 귀부인들, 야손과 그 형제들이 복음을 믿고 따랐습니다. 여호수아의 헬라식 발음인 야손, 그의 집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정교회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불과 3주의 전도로 생겨난 교회, 지금으로 말하면 어디 대도시에 가서 3주간 전도 집회를 가졌는데 교회가 생겼다는 거죠.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이 교회가 아주 좋은, 칭찬 받을만한 교회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7
자, 이런 좋은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낸 것은 그러나 이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을 만나보면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 다시오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것은 정말 앙꼬빠진 찐빵 같은 것입니다. 결론이 없는 거예요. 핵심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을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한 일인 겁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 짧게는 안식교라는 이단때문에 예수 재림에 대한 진리가 함께 오해받아서 그런걸까요? 하여간 바울은 여기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면서도 예수 재림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나중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짧은 전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성장을 이루어낸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인사말을 전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1
보통 바울은 서신의 시작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도된 바울은” 이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굳이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는 이유는 뭡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선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기독교인을 핍박하기에 앞장 섰던 바울은 사도권에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저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으로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회중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사도권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가 전하는 말씀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심령에 온전히 다다를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권 주장은 복음 전파의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냥 기분이 나빠서, 자존심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서의 인사말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 바울이라고 쓰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으로 그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복음이 그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박히고, 그 결과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본이 될만한 믿음의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실루아노를 이야기 합니다. “실라” 라고도 불리는 실루아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는 선지자 그러니까 예언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2절을 보면,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에 바울과 동행한 실라.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함께 전한 실라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공신력을 더하여주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실라와의 동행은 바울이 자기 멋대로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지원을 받는 온전한 복음을 전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실라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정통성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정통성을 믿게 하심으로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칭찬 받을만한 성도들로 성장 시키셨습니다.
또한 바울과 실루아노와 함께 써 있는 이름, 디모데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를 가졌으나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을 이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 있던 그는 바울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바울은 그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디모데가 바울을 만난후 할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미 성인이 다 된 디모데, 당연히 할례를 받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더구나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에서 구원을 위하여 주 예수의 은혜면 충분하고 믿음이면 충분하지 거기에 뭔가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다고, 그래서 할례가 구원의 요소가 될 수없다고 확정된 상황에서, 그렇게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하던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함은 무슨 이유입니까?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19-20
바울과 디모데는 너무 강팍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신념으로,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인 할례를 행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수고로움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행위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율법의 준수가 아닌, 타인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디모데의 삶 속에 녹아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디모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을 보고 느끼게 하심으로,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많은 교회들에게 모범이 되는 귀한 교회로 성숙할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인사말에서 쓴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끄셨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받는 대상을 이야기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라고 하고 있습니다 (데오 파트리 카이 퀴리오 예수 크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여러번 나누어서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말로 “주” 라고 하는 단어의 원어는 “퀴리오”, 히브리 말로는 “아도나이” 입니다. “나의 주”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여호와 야훼를 감히 부르거나 쓰지 못해서 쓴 말이 아도나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말을 예수님을 부르는데 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아” 또는 “여호수아” 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히브리어가 “여호수아” 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죠.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호칭과 “하나님 아버지” 라는 단어를 “그리고” 라는 뜻의 “카이” 라는 등위 접속사를 써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카이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동등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동등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진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짧은 인사말 속에 깊은 진리의 가르침을 담아 놓았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선택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는 씻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평강이라는 말은 원래 별 문제 없는 상태, 부요함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평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평강” 입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슬픔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로 인해 얻는 나라는 존재의 완전함, 그것이 평안함 입니다. “주여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의 고백, 그것이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결과, 그것이 평안함 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복의 시작인 은혜로부터 복의 결과인 평안함을 누리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살전 1:2
바울은 짧은 전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감사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3
성도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우리가 흔히 들어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다소 추상적이어 보일 수 있는 믿음, 사랑, 소망을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고 바울은 기록하였는데요. 이 말은 매우 구체적인 말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참된 기독교의 간략한 정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 즉 모양만 성도가 아닌 참된 성도, 기독교인인 척 하는게 아닌 참된 기독교인, 가라지가 아닌 구원이 약속된 참된 주의 자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이야기한 3절의 말씀을 통해 참된 기독교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첫째로, 믿음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영어성경이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해 놓았는데요, 이 말은 “믿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열매” 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 삶 속에서 맺는 열매가 세상 것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매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과물이 다르다는 거지요. 믿는 자의 삶은 그러기에 믿음이 없는 자와 같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는데 세상사람들과 너무 똑같다.. 믿는다고 하는데 믿기 전하고 바뀐게 하나도 없어.. 어떤 건 세상사람들 만도 못해..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짠맛이 나는게 당연하고, 어두운 방에 등불을 놓으면 환해지는게 당연한데, 믿음을 갖고도 결과물이 늘상 똑같다.. 그럴순 없다는 거지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를 믿음으로 전과는 다른 삶,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일수도 있고요, 입에서 터져나오는 감사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사모하는 것일수도 있고요, 기도할때면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입술에 찬양이 맴도는 것일수도 있고요, 그것은 늘상 하던 일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표현할수 없는 담대함일수도 있고요, 이유없는 기쁨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믿음 때문에 그들과 우리가 변했다는 겁니다.
둘째로, 참된 기독교에 대한 정의는 사랑의 수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생각하며 해석해 보면, “사랑때문에 하는 수고” 입니다. 여기서 수고로 번역된 ‘코프’ 라는 단어는 그냥 단순한 수고가 아닙니다. 직장 동료들이 퇴근하면서 ‘여러분 오늘 수고했어요’ 하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아주 고되고 엄청나게 힘든 수고. 아, 뭐 저렇게까지 하나.. 하는 정도의 수고를 말합니다.
초기의 기독교는 박해받음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맞고, 죽고, 빼앗기고, 도망하고, 숨어야 하는 일들이 복음이 퍼지는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험입니다.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왜 복음을 전합니까? 왜 전도를 하고 왜 선교를 갑니까? ‘아, 저 사람들도 예수를 알면 참 좋겠다.. 아, 저 사람들도 구원을 얻으면 참 좋겠다.. 혹시 이 복음 전함으로 저들이 구원을 얻을 줄 누가 아나..’ 이것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수고입니다.
또한 구제는 교회가 오랫동안 행해온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미국, 한국 얼마나 잘 삽니까. 전세계 1위, 전세계 10위권. 그런데도 남을 돕는다는게 쉽습니까? 어렵죠. 그런데 2천년 전에 남을 돕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남한테 한끼 대접하면 나는 한끼 굶는 수준이 아니었을까요? 내것을 떼어서 남을 돕는 것, 내가 한끼 굶더라도 남을 돕는 것, 이것이 사랑때문에 하는 수고 입니다. 참된 기독교 안에는 사랑의 수고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참된 기독교에 대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 데살로니가 교회가 소망한 것은 뭡니까? 예수님의 다시오심,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오늘을 이깁니까. 어려운 시절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엇을 생각하며 인내하였습니까. 예수 다시오심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없을 수 없는 이 소망. 그리고 그 소망으로 인한 인내. 이것이 참된 기독교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의 바울이 쓴 인사말의 첫부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셨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어떻게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는지, 그들이 이룬 교회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참된 기독교에 대한 간략한 정의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 각자가 깊이 묵상하심으로 본이 될만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내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