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 6:11-18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시간
이제 한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2024 라는 숫자는 기억속으로 사라져가고 2025 라는 숫자속에 또 일년을 살아가겠죠. 여러분은 새해를 맞이하며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기대되는 마음으로 들뜨게 되나요, ‘더 늙는구나..’ 하는 마음에 우울하신가요, 아니면 올해는 이 일을 꼭 해 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의욕이 넘치시나요.
저는 주로 기대되는 마음으로 들뜨곤 했습니다. 어렸을 적엔 더 그랬죠. 새해가 되면 뭔가 많이 바뀌고 어려운 일들도 다 없어지고 신나고 재미난 일들만 많이 일어나고 그리고 낡은 것은 지나가고 반짝반짝 새 것들이 생기고.. 그런데 이제 50여년 살아보니까, 새해가 되어도 어제와 똑같은 해가 뜨고. 새해가 되어도 어제와 똑같이 먹고 또 똑같이 자고 지난해에 쓰던 물건 올해도 또 쓰고 지난해에 하던 일상 올해도 비슷하고.. 별로 달라지는게 없는거에요.
그래서 이제는 연말이 되어도 새해가 되어도 그렇게 들뜨지 않습니다. 그저 ‘지나간 한해 감사했다..’ 하는 생각이 들 뿐이지요. 변화는 새해가 된다고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디서 오는걸까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사실 변화는 내가 변해야 옵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 지난해와는 다른 새해의 내가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겠지요.
갈라디아서의 마무리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나눕니다. 1년이 넘게 함께 나누었던 갈라디아서 강해는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 왔을까요. 이 갈라디아서를 쓴 바울은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어떻게 변화하기를 소망 했을까요.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적으로 마치 지난해에 있었던 일들과 같은 율법, 그리고 이제 예수 오심으로 새해 새날과 같이 시작된 복음, 그 변화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2024년에서 2025년으로 바뀌었는데도 날짜 쓰는 란에 자꾸 2024 라고 잘못쓰는 것과 같이, 율법에서 복음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자꾸만 믿음에 율법을 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하여, 왜 믿음이면 충분한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이제 그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여라, 율법에서 자유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하여라, 그렇게 선택 받은 자의 자유함을 그리스도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갈라디아서 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이신칭의,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신학을 굳게 정립하는 책인 것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지나간 율법을 붙들고 놓지 못하며 복음의 참된 의미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복음의 참된 능력을 이해하고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것이지요.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2000년 전의 유대주의자들에게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값비싼 공짜
사람들이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중 하나는 값비싼 공짜 입니다. 보통 거저받는 것은 별로 값없는 것이기 일수입니다. 1불짜리 볼펜 한자루, 조그마한 손 티슈 한팩, 망가지기 쉬운 부채, 그런 것들이 거저받는 공짜 아닙니까. 공짜는 값비싼 것이 드뭅니다.
그런데 누가 서울 강남의 100평짜리 아파트를 공짜로 주겠다, 평생 쓸 돈을 공짜로 주겠다, 매년마다 벤츠 자동차를 거저 한대씩 주겠다.. 이러면 쉽게 믿어 지겠습니까. 더욱이 거져 준다는 약속을 믿기만 하면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말이 쉽게 믿어질 만한 이야기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은 가장 값비싼 공짜 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복음을 거부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지식으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 역사속에서 믿음으로 거저 구원 받는다는 말보다는,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값진 것을 거저 받는다는 것이 정말 믿기 힘든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식은 때로 우리를 잡아매는 올무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대를 넘어 꾸준히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이제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갈 6:11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내가 많은 서신들을 썼는데 잘 살펴 보아라’, 혹은 ‘내가 복음전파를 하느라 육체노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 손이 거칠어지는 바람에 글씨를 작게 못쓰는 것 아니냐’ 라고 바울자신의 고난을 표현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혹은 대필을 이용한 바울이 ‘이제 여기는 결론이니까 내가 직접쓰겠다..’ 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이렇게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어느 하나도 우세하게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자, 이제 결론을 말할테니 집중하세요’ 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합니다. 우리도 집중해서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의 결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의 두 부류
바울은 두 부류의 다른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구절은 갈라디아서 6장 12-13절에 나옵니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갈 6:12-13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자,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분명히 구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가르침에 대해서, “음.. 그것도 중요하지만 할례를 받지 않으면, 율법을 안지키면, 충분히 선행을 하지 못하면, 그럼 구원을 못받아” 라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 들이지요.
예수께서는 오셔서 분명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짐을 덜어내어 주셨는데,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욱 더 무거운 짐을 지우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람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양을 낸다’ 라고 쓰인 원어는 ‘외관을 좋게 하기’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 오늘 모양 좀 냈어’ 하는말과 비슷하게 이해하기 쉬운데요. 그러나 여기서 쓰인 이 말은 “성도라면 어떤 식으로든 멋을 내면 안된다. 외모를 꾸미면 안된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단정하게 모양을 내고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는 것은 (딤전 2:9) 오히려 교회에서 권장되는 일인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쓴 모양을 내려 하는자 ㅡ 즉 외관을 좋게 하려는 자라는 말은, 내적인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저 외면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사람들
다시말해서 유대주의자들은 쉽게 말해서 내적으로 깊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는 척 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외면 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성도인 척하는 사람들, 훌륭한 신앙을 가진 척하는 사람들, 성령충만한 척하는 사람들, 이런 척 저런 척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합니까?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부패함을 가립니다. 그러기에 더욱 과장해서 이런 척 저런 척, 믿는척, 신실한 척을 하는 겁니다.
유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강요하는 사람들. 사실 그 속이 썩어있기 쉽상이라는 말입니다. 유난히 교회의 행사를 강조하는 사람들. 유난히 예배의 형식에 집중하는 사람들. 유난히 헌금을 강조하는 사람들. 유난히 예배당의 규모를 강조하는 사람들. 유난히 성가대의 수준을 강조하는 사람들. 유난히 뭔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외면에 치중하는 이유는 뭡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보시고 그 속까지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보다는 사람들의 평가, 그저 눈에보이는 외적인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외면을 더욱 두텁게 색칠해 나갑니다.
여러분 “갑각류” 잘 아시죠. 바닷가재 , 게, 조개 이런 것들의 겉은 어떻습니까? 딱딱하고 견고합니다. 왜 그렇죠? 속이 흐물흐물 하니까. 속이 물렁룰렁 연약하니까. 그러니까 겉이 그렇게 딱딱하고 두꺼운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굳건하게 믿음위에 바로 서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려하고 사람들에게 뭐가 맞네 틀리네를 따지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강요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내면 속 깊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기에, 온전한 율법의 준수, 예수께서 완성하신 완성된 율법인 사랑을 행할 능력도 그것을 이루고 싶은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과는 다른 또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지금이야 십자가가 장신구로 목에 걸기도 하고 십자가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사실 예수님 이전에는 저주, 죽음, 부끄러움의 상징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사랑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저주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남을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안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의 행함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해 내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구원을 얻어낼 만큼 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의 죄,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원죄, 살아오면서 지어온 자범죄, 그 모든 죄는 예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피로 씻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 이 복된소식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 안에 예수님의 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의를 가진 복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 예수의 의로움이 이유가 되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참된 성도는 구약에서 말하는 행위만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의 참된 성도는 십자가 앞에 소멸될 대상인 욕망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로 인하여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 6:15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 태어났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안에는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 바로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속은 형편없이 물러 터졌으면서 겉으로만 훌륭한척, 형식과 행위에 집착하는 갑각류와 같은 유대주의자들, 그들과는 전혀 다른 성령의 힘으로 내적 강건함을 입어 믿음을 굳게 붙잡은 주님의 새로운 피조물들, 성도가 교회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를 받느냐 마느냐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율법을 지키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안에 예수가 있느냐, 예수가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가진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가진 성도는 그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됨의 복을 누립니다. 예수를 가진 성도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그 안으로부터 그 밖까지 점차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를 가진 성도는 예수와 함께 하는 기쁨을 알기에 천국을 소망하며 마지막 날 예수의 재림을 소망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는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 뿐이라고 외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런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 삶 속에 예수가 가장 중요하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삶의 기준이 예수인 사람들. 예수 때문에 웃고 예수 때문에 울며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 가려 애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그들을 바울은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 6:16
이 구절의 여러 성경 번역본을 살펴 보았는데요, 대부분 이 규례를 행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써 놓았습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자,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그렇지만 한국말로 ‘그리고’ 라고 번역한 원어는 더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보다는, ‘즉, 다시 말하면’ 이라고 번역하는게 좀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런 원어를 기준으로 이 구절을 다시보면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자, 즉 하나님의 이스라엘’. 또는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라고 보시는게 맞는 이해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규례는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중심이되어 사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삶의 1순위로 놓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가 가장 중요한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혈통적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거지요.
여러분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의 뜻이 기억 나십니까. 야곱이 위기앞에서 축복을 얻기위해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씨름을 하다 얻어낸 이름 아닙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 단어 이스라엘은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때문에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어린 아들과 팔씨름을 하는데, ‘어이구, 못 이기겠다’ 하고 쳐주는 것과 같이,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단어라고 함께 나누었던 적이 있지요.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이 그 단어안에 녹아 있습니다.
예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가장 특별하게 사랑하시겠다는 말씀을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세상에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평강과 긍휼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유대주의자들과는 다른, 겉으로만 신실한 척하는 자들과는 다른, 교회 안의 또 하나의 부류, 진정한 성도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새해에는 예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 모두 지금부터 영원토록 예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로서 살아 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의 심령에 가득 담고 기쁨으로 감사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됨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 갑시다. 그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