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6장 6-10절 =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 6:6-10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자세히 설명한 바울은 엇나간 성도를 바로잡으며 성도간에 짐을 나누어 질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 사랑을 성취하는 것임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구절은 갈라디아서 6장 6절의 말씀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6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사실 이 말씀은 얼핏 보기에 목사인 제가 직접 말씀드리기 좀 쑥스러워 보이는 그런 구절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르치는 자는 오늘날로 하면 저와 같은 목사들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주장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해석을 기준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면, ‘목사들이 영적인 가르침을 주니까 성도들은 목사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물질을 공급하라’ 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신학자들이 덧붙이는 해석은 ‘학교 선생님한테도 수업료를 지급하며 배우지 않느냐, 세상 것도 돈을 내며 배우는데 영원한 것, 영생과 관련된 영적인 것을 배우면서 물질로 보답을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해석이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겠죠.

그런데 거기서 한발 더 나가서 ‘성도들이 목사들을 잘 지원해야 목사들이 먹고 사는일 보다는 영적인 일에 전념해서 더 좋은 영적 양식을 공급하지 않겠느냐..’ 라는 이런 해석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이구절을 방금 말씀드린대로 그렇게 이해했다면 저는 아마도 이 구절을 설교하기가 아주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거래도 아니고, ‘내가 이거 줄테니까 넌 그거 나한테 줘..’ 하는것 같잖아요. 영적인 것을 주었으니까 충분히 먹고 살만큼 물질적인 것을 달라고 청구하는 것 같잖아요. 거저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은 어디로 간거죠? 더욱이 성도가 물질을 공급해야 목사가 풀타임 목회로 전념을 해서 더 좋은 것을 나눌수 있다는 해석은 저 처럼 일하며 목회하는 목사로서는 참 거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주 존경을 많이 받으시는 한국의 한 목사님이 계신데, 그분은 신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분이 풀타임 목회만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다가 아주 난리가 난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풀타임으로 목회에만 전념하면 좋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목회 상황에서 일하며 목회하는 일목들을 비판하는 듯한 말씀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씀이라는 거죠. 저도 그 목사님을 많이 존경해서 오랫동안 그분의 말씀을 들어왔는데, 이 설교 댓글창에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그 운영자가 댓글창을 아예 닫아버렸더라구요. 그 목사님이 그렇게 공격 받으시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어요.

자 그렇다면, 바울이 이 구절에서 한 말은 정말 “목사들이 목회에만 전념하게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그들을 도와라” 하는 그것이 핵심 내용일까요? 만약에 그렇게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조금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앞뒤 문맥과는 조금 생뚱맞고, 억지로 끼워넣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왜 이 구절이 여기에 있을까에 대해 생각을 조금 더 해 보아야 합니다.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 10:7-10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하신 말씀이죠. 이 말씀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주제와 연결해 생각해보면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보답은 당연하나, 말씀 전하는 것을 도구로 재산과 부를 축적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죠. 그저 그날의 먹을 것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전 9:11-12

바울의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두 말씀을 종합해보면,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사례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비판받을 일이 아니죠. 그러나, 받아도 되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안받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복음에 방해가 될까봐, 말하자면 돈 벌려고 목회한다는 소리 들을까봐, 차라리 안받겠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 아닙니까.

물론 바울은 사례비를 받은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복음을 위해 사례비를 거부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바울은 많은 기간 텐트를 직접 만들어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유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미국에서는 일하면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을 텐트메이킹을 한다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갈라디아서 6장 6절의 말씀을 목사들에게 물질을 많이 바쳐서 일 안하고 목회만 전념할 수있게 하라고, 풀타임 목회를 하게 지원하라고, 그렇게 한쪽 방향으로만 강조해서 해석한다면, 그건 너무 무리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6장 6절의 말씀은 풀타임 목회를 강조하는 말로, 목사들의 사례비를 강조하는 말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풀타임 목회가 맞냐, 사례비를 주는게 맞냐, 그것이 이 구절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교회의 상황에 맞게 조절한 바울이 한쪽 방향만이 옳다고 말했을리가 없지 않습니까?

초대교회에는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고,바울과 같이 말씀을 전하고 다니는 사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는 이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들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겁니다. 신령한 것을 받고 육적인 것으로 보답하는 모습. 영적인 것을 나누고 실제 물질적인 것으로 보답하는 모습 (롬 15:26-27).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는 거죠.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영적인 믿음과 육체로 행하는 선한 행동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의 말씀을 전한 목회자들에게 물질적인 보답을 하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실질적인 행동으로 선을 행하는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구절의 주제입니다.

너희가 영적으로 거듭났느냐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느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여라

이 말씀의 고리가 되는 구절이 갈라디아서 6장 6절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믿음을 그저 추상적인 개념에 가두어버리는 시도. 사랑을 그저 마음속에만 머무는 관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영적이란 말은 그저 표현될 수 없는 내재적인 가치로만 치부하려는 시도. 그것은 틀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 많은 교회들이 행동하는 선함이 없어서 욕을 먹고 있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참 이상하게 왜곡해서 사용하고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성도가 선을 행하는 것이 어떻게 충돌되는 개념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하는 여인에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하는 것이 어떻게 충돌되는 개념이 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그러니까 이제 아무것도 노력할 필요도 선하게 살 필요도 없다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너무 악한 해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인 것을 나누는 선생에게 물질을 나누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과 같이, 너희가 영적 믿음을 온전히 가졌다면 선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7-9

성령으로 심으라고 하면서 선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을 행하는 것은 몸으로 하는 것이니까 육체의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명백한 진리를 왜곡해 오는 걸까요? 믿음과 성령의 열매를 분리하려는 시도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갈라디아서 6장 7절을 다시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우리말로는 3절에 나오는 스스로 속인다는 말과 7절에 나오는 스스로 속인다는 말은 같아보입니다. 그런데 원어는 3절과 7절에 나오는 단어를 각각 다른 뜻의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3절의 스스로 속이는 것은 그냥 자기 기만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거죠. 그런데 7절의 스스로 속임은 미혹된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쁨으로 노력하고, 성도다운 경건한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는 것,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 말도 안되는 논리에 어이없이 미혹되어서 이제 믿음이면 그만이니까 행함은 무조건 율법이니까 아무렇게게 막살자.. 라는 어리석은 결론에 이른다는 거죠. 또는 반대로 믿음만으로 부족하니까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자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 즉 원어로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준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가는데에는 반드시 사단의 미혹함이 있습니다. 복음을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게 하는 데는 반드시 사단의 미혹함이 있습니다. 믿음에 구원의 힘이 있음을 부정하는데에는 반드시 사단의 미혹함이 있습니다. 사랑을 마음속에만 있는 관념으로만 묶어버리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요이 1장4-8절

또한 요한 1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1서 2장 3-6절의 말씀을 조금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4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익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아니냐를 분간하는 방법입니다.

요일 2:3-5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심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예수안에 거하며 진리에 따라 행함으로 증거되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합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나오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 는 말은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 설교를 듣는 것, 기도를 하는 것, 묵상을 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삶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속에서 나와 나의 형제 자매를 위하여 전심으로 전력으로 살아있는 행위로 표현해 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여기 예수를 모르는 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성경에 대해 관심도 없어요. 기도가 뭔지도 몰라요. 교회는 가본 적도 없어요. 왠지 누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마음에 안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한 성도를 만났어요. 처음엔 교회다닌다고 해서 못마땅하게 봤는데, 가만히 보니까 이 성도가 참 달라요. 참 괜찮아요.

얼마나 말 한마디를 해도 따뜻하게 하는지 몰라요. 얼마나 이해심이 많은지 몰라요.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지 몰라요. 자기일은 똑부러지게 하면서도 남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몰라요. 자, 이런 성도를 볼 때 무슨 생각이 들까요? 왜 다를까.. 이 사람은 왜 다를까.. 이 사람은 왜 남들같지 않을까.. 크리스챤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자, 이런 일들이 우리 모두의 삶속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성도라고 하면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세상사람들과 전혀 구분되어 있지 않다면, 그러면서도 영생을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면, 그것은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려는 악함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믿음과 선한 행위를 연결시켜 설명한 바울은 이제 두 가지 권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어성경에는 이 구절의 시작을 “그러나” 라는 뜻의 접속사 “데”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이 앞구절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 그것을 삶속에서 구현해내는 선한 행위를 할 때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점은 첫째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성령의 열매를 삶속에 구현해 내며 선을 행하는 성도들은 자신이 선을 행하는 대상들이 온전히 변화하기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좀 더 알면 얼마나 좋을까.. 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좀더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알려주신 모습대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때는 변화가 너무도 느려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떤 때는 변화가 너무 작아서 달라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기대한 때에 기대한 만큼 안 나오니까 실망하고 낙심하지요. 나의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이렇게 애를 썼는데 왜 변화가 없지.. 좌절스러운 겁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았을까요?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6-8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선을 행하여도 그 결과물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떄에 맞게 자라나야 할 것을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그 결과를 좀 더 주께 맡길 수 있다면, 그 때를 조금 더 주님께 맡길 수 있다면, 낙심하여 선을 행함에서 떠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설교의 마지막 구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 6장 10절

이 말씀은 착한일을 할 때 우선순위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는 이 말씀은 성도들끼리만 착한 일을 나누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말에 앞서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특별히 성도들을 잘 챙기라는 말은 왜 하는 걸까요?

첫째 이유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먼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가식없이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밖에서만 좋은 아빠
밖에서만 좋은 엄마
밖에서만 좋은 남편,
밖에서만 좋은 아내
밖에서만 좋은 아들, 딸

사실은 그냥, 좋은 사람 아닙니다.

둘째 이유는, 성도간의 선을 행함으로 교회가 더욱 강건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도구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시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시고, 힘든 자를 위로하시고, 어려운자의 피난처로 사용하십니다. 그러기에 성도간의 선을 행함으로 교회가 더욱 강하게 결속되는 것은 일의 순서상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사랑의 행위인 선을 행함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분명한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온전한 선함을 성도들의 삶 속에서 변함없이 꾸준히 생동감있게 구현해 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믿음안에서 승리하시는 삶을 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