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6장 1-5절 =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갈 6:1-5
미국 생활을 하면서 조금 생소한 일중에 하나는 항상 앞서간 사람들이 문을 잡아준다는 겁니다. 이걸 도어홀더라고 하는데, 자기가 통과한 문으로 누가 따라오나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몇 발자국 뒤에 사람이 있으면 그 문을 잡고 기다립니다. 특별히 친절한 사람들만 그러는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합니다. 아주 당연한 일처럼 그렇게 해요.
사실 별거 아니어 보이는 이런행동은 뒷사람에 배한 배려입니다. 뒷사람이 닫히는 문에 부딪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배려인 동시에 뒷사람이 다시 문을 열 때, 들어가는 힘을 덜어주려는 배려인거죠.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일상에 녹아있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저는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마음을 배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훈훈하잖아요. 별것도 아닌 일로 서로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참 좋아보여요.
한국에는 없는 이런 문화.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의 뿌리가 기독교 신앙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남을 위한 적극적인 배려, 남을 위한 수고, 남을 위한 행동.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육신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구분하여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이기심, 자신의 쾌락과 자신의 안위만을 쫓는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그리고 온유와 절제,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즉 삶 속에서 성도로서 맞고 틀림을 구분할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그런데 바울은 이런 맞고 틀림의 구분에 관한 이야기 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 6:1
죄를 구분할 능력은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데, 어떤 사람의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어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고 있는건지, 어떤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짓고 있는건지, 어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를 짓고 있는지를 온전히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에 충만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기 위해선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신령한 너희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인거죠.
이처럼 성령으로 살아가고,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을 따라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는 거예요. 성도라고 하면서도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고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거예요. “지금 모르고 저러는 걸까? 지금 알고도 일부로 저러는 걸까? 아니, 성도가 어떻게 그래.. 어떻게 저렇게 음란하지.. 어떻게 저렇게 우상숭배를 하지.. 어떻게 저렇게 방탕하지.. 아니, 왜 그렇게 맨날 화내고 싸우지..”
죄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죄를 보았을때 그 반응은 어떻습니까. 피하던지, 맞서던지 그렇겠죠.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피해라, 맞서 싸워라” 이럽니까? 아니죠. 첫째,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 둘째,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
우리는 자주 성도의 올바른 모습을 생각할 때, 분별과 분열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잘못을 구분하는 것과 정죄하는 것을 같은 부류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선한 권고를 마치 대적하는 것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무것도 분별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으로 끌어 안으라는 말은 또 무엇일까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그렇습니다. 잘잘못을 알지도 못한다면 거기에 무슨 용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회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믿음은 죄에 대해 오히려 더욱 민감해지고 잘못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구분하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요, 그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별력을 가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을 정죄하기 쉬어집니다. 그러나 정죄함은 사람의 몫이 아니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성경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것 아닙니까. “그런 자를 바로 잡아라, 네 자신을 살펴보아라”
자, 그렇다면 먼저 어떻게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습니까?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바로잡다”는 단어의 원뜻을 보면 “회복시키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좋은 것인데 손상을 입었다는 거죠. 원래 바른 것인데 망가졌다는 겁니다. 죄가 드러난 사람을 볼 때, ‘어유, 저렇게 나쁜 사람이었어? 어유, 저렇게 엉터리였어?’ 이렇게 보는게 아니라, ‘아, 믿음의 사람인데 어쩌다 실수했나보다.. 아, 참 신실한 사람인데 어쩌다 실족했나보다..’ 이렇게 본다는 겁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것이 바로잡음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형제 자매된 성도들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바로잡음에 대한 방법으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5-17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얼핏 보기에 간단해 보이는 이 과정은 그러나 실제로 행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과정입니까.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야 가능한 과정이겠습니까. 오늘날 어떤 교회가 이러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데 이 구절을 들으신 어떤 분들을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정죄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면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긴다는 것은 정죄 아닌가요?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도 안되면 정죄하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정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의미는 죄 지은 형제 자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성도들과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교회 공동체로부터 소외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16장 17절을 보시면 그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롬 16:17
최선을 다해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그래도 변화하지 않으면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거죠. 정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족한 자들을 되돌리려는 노력. 이러한 것은 바로 형제 자매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입니다. 실족하여 죄에 넘어진 형제 자매의 짐을 함께 지려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2
그리스도의 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랑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알아 분별함이 생기면 그 분별함으로 형제 자매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를 실족함에서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 사랑을 성취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갈 6:3
이것은 영적 교만함에 관한 경고의 말씀이죠. 영적 교만함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잘 안다, 내가 성경을 잘 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잘 안다, 내가 성도답게 잘 산다, 남들보다도..’ 이런 생각이겠죠. 그런데 누군가 진짜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 지식은 그럴 수 있습니다. “아, 이만하면 나 정말 대단해.. 나 많이 알아..”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무슨 무슨 분야의 권위자,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권위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권위자, 이건 말이 좀 안되는 겁니다. 여러분, 망망 대해에 조그만 배 위에 앉아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웅장한 자연, 그랜드 캐년 같은 곳에 가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생각할 때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은 무한히 크셔서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무엇이 느껴집니까. “아, 나는 하나님을 정말 잘 모르는구나..”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무엇이 느껴집니까. “아, 나는 주님의 말씀을 정말 잘 모르는구나..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작은 부분이구나..” 그 크신 하나님, 그 크신 진리 앞에서 나의 작음과 무지함에 대해 인식되어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본인 스스로 뭔가 진리를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권위자가 된 것처럼 생각된다면,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진리 앞에 실족하여 넘어진 형제 자매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는 사랑의 일을 가로막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진리는 알면 알수록 우리가 작다는 것을,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이유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영적 우월감은 자신을 속이는 근거없는 교만함 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막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 6:1
본문에 “살펴보아” 라는 원어를 확인해 보면, “경계하다” 라는 단어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이 실족하는걸 보면 나도 그 파도에 넘어질 수 있다는 걸 인식하며 경계하라는 겁니다. 신앙은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남보다 좀더 두터운 신앙을 가졌다고 구원을 받는게 아닙니다. 남들이 넘어진 그 시험, 나는 이번에 잘 넘어갔다고 다음도 잘 넘기리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그 사람보다는 좀 낫지 않아요..’ 하는 말은 구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기에 나와 남의 신앙을 비교하는 자세는 참으로 부질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의 믿음의 삶을 달리기 경주에 비교하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주하는 자와 같이 열심을 다하라는 말이지, 늘상 남들과 비교하는 삶을 살라는 말은 아닌거지요.
신령한 성도.
죄를 분별할줄 알면서도 형제 자매의 실족함을 정죄하지 않는 성도.
실족한 사람들을 위해 어렵고 무거운 짐을 나눠지며 그들의 회복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성도들은 상대방의 실족함 앞에서 우쭐되며 자신이 넘어지지 않음을 자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다보는 지혜로움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바울은 좀더 구체적인 말을 합니다.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갈 6:4-5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그런데 본문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스스로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교만함을 경계하였는데, 이 구절은 마치 자기 자랑을 권장하는 것 같죠. 그리고 조금 전에 짐을 서로 지라 (갈 6:2) 했는데, 지금은 각자의 짐을 지라고 하니까 앞뒤가 좀 안맞아 보이죠.
이게 무슨 신령한 성도가 해야 할 실질적인 자세가 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절인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문을 살펴 본문을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짐에 관한 내용을 보면 2절에서 말하는 짐과 5절에서 말하는 짐은 우리말로는 둘 다 짐이어서 별 차이를 못느끼지만, 원어에서 2절의 짐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을 말합니다.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 죄의 문제는 때로 혼자 감당하고 혼자 넘어서기에 너무 큰 짐일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간의 이해와 위로와 권고로 그 짐을 나눠지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거죠. 이에 반해서 5절에서 말하는 짐은 요즘말로 말하면 작은 백팩 (BACKPACK) 을 말합니다
나의 소소함이 들어있는 작은 백팩. 내게는 소중하지만 누구에게 들어달라고 맡길 수 없는 그런 것들. 그 무게를 나 스스로 감당해야하는 그것들. 남에게 돌릴 수 없는 나의 믿음의 의무들. 그것을 각자 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우선 영어성경이 조금 더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자랑스러운 이유가 남보다 나아서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나는 뭐가 자랑스럽습니까? 죄성을 끊어내지 못하는 나, 때로 너무도 어리석은 나, 진리앞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조그마한 나, 보잘 것 없는 나. 이런 내가 뭐가 자랑스럽습니까? 무엇이 자랑스러울까요? 여러분은 무엇이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십자가.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필요가 없는, 누구와도 견줄 필요가 없는 나 자신과 예수와의 관계안에서만 존재하는, 성도가 성도되게 만드는 성도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가슴에 품은 성도는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짐을 짊어질 뿐 아니라 실족한 형제 자매의 짐을 묵묵히 함께 지고 나가는 인내의 길, 사랑의 길을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토록 예수 십자가가 여러분의 자랑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을 성취해 내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