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5장 22-26절

우리는 지난 시간에 육체의 일에 대하여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지는데,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요, 하나님의 영광과도 상관없는 일이요, 영원하고도 진정한 기쁨과도 상관없는 일이요, 영적 목마름을 채울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부질없는 일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것이 육체의 일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대적되는 이 육체의 일들은 결국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예수 십자가 보혈로 이미 구원 받았으나, 그러나 아직은 육체안에 놓인 성도들조차 경계하고 밀어내어야 할 것들임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하여야 할 내용은, 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 육체의 일들을 나의 삶 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많은 성도들은 육체의 일들 앞에서 넘어집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아, 나는 의지가 참 부족한가봐. 아, 나는 믿음이 참 부족한가봐. 아,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아, 나는 성도인데, 집사인데, 목사인데.. 왜 이것밖에 안되는걸까..”

물론 육체의 죄를 져 놓고도 전혀 거리껴하지 않거나,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너무도 당연시 하거나, 사람은 다 그런거야 하면서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나서는 사람들 보다야 죄를 져 놓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사람들, 차라리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당연히 그렇지 못한 사람들 보다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 이겠지요. 당연히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자책은 자칫 사람들을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육체의 일을 이겨낼 수 있는가에 대한 좀 더 올바른, 좀 더 성경적인 방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육체의 소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말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주체가 육체의 소욕 대 선한 나의 자아, 또는 육체의 소욕 대 굳센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은 이 내용을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

이게 무슨 뜻의 말씀입니까? 내 안에 일어나는 갈등의 주체, 육체의 소욕을 막으시는 주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육체의 소욕을 몰아내시는 주체가 내가 아닌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지요. 나는 못하고요, 나는 할 힘이 없고요, 사실 나는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나는 나의 죄성을 내 힘으로 몰아낼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나의 이기심이라는 뿌리에서부터 나오는 육체의 일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직접 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깨끗게 하셨으며, 보혜사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직접 사탄과 대적하시며,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어차피 내 싸움이 아니니까 넋 놓고 앉아 있으면 됩니까.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면 됩니까. 그럴리가 없지요.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8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성령을 따라 행하는것,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성령으로 사는 것, 이것은 무엇입니까. 25절의 성령으로 행한다라는 말은 16절의 행한다는 말보다 더욱 엄격하게 쫓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비슷한 이 말들을 반복하면서 성령으로 사는 삶의 의미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으로 사는 인생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그분의 모든 것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과 같이, 예수께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소개의 말씀을 명확하게 남기셨습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보혜사” 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변호사, 조력자, 위로해주는 자, 친구라는 뜻입니다. 옆에서 나를 돕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돕는 분이 어떤 분인가 하면, 진리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을 이해할때에, 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시는 분,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를 일으키시는 분, 기적을 나타내시는 분, 뜨거운 눈물과 뜨거운 찬양을 일으키시는 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우연을 만드시는 분, 이렇게 이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이러한 일들이 성령님의 주권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영”,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의 뜻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눈물로 찬양하고 감정이 막 북받쳐 올라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고 크게 흥분하고 놀라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은 진리의 영, 성령을 가진 성도들만이 갖는 특권입니다.

2천여년전 예수님은 성육신 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직접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의 언어로 진리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처럼 예수님이 직접 전하신 말씀들이 나오는데요, 마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비유로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막 4:11-13

이 말씀후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비유의 말씀을 이어가시지 않습니까. 그 비유의 말씀중에 예수께서는 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4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가복음 4장 23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외인들,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는자들에게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된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셨까요?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마가복음 4장 33-34절

선택된 제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특별히 해석해 주신 예수님.
선택된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특별히 해석해 주시는 성령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는 성도들은 이처럼 보혜사 성령님의 가르쳐 주시는 바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이해한 결과로 진리를 사랑하며, 그 진리가 내 안에 자꾸 자라나서 마치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그래서 철을 따라 열매맺는 나무처럼 성령의 열매가 삶 속에 자연스럽게 드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공급되어야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육체의 소욕을 누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으로 행하는 변화받은 성도의 삶을 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순간적인 뜨거운 감정만 가지고는 성령의 열매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어릴적에 한국에서 아주 뜨겁기로 소문난 교회에 다닌적이 있었습니다. 예배시간이 얼마나 뜨거운지 몰라요, 눈물에 방언에 신유에.. 남들이 보면 이 사람들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같이 보일정도로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막 사람들이 눈물 범벅이 되서 두손을 높이 올리고 찬양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열기가 참 은혜로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뜨겁던 이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면 먼저 길이 막히기 전에 나가겠다고 밀고 당기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감정과 열기는요,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초를 감정과 열정으로만 쌓아 올리면 오래가지 않아 식어버리기 쉽상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의 감정만을 터치하지 않으십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눈, 영안을 열어 주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이해되어서 우리의 영에 와서 박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걸어가는 삶의 방식이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진리를 얻은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변화, 성령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육체의 일들과는 반대되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표현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이 구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들을 잠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대표적인 성령의 열매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이기적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사랑인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에 대해서 자세히 나누려고 친다면 몇 번에 걸쳐서 나누어도 부족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육체의 일과 반대되는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이 사랑이 당장 내가 좋으려고 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교합니다. 그 성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 사랑이 있지요.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나를 죽이는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성도가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희생하고 봉사합니다. 그 성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이웃을 향한 아가페 사랑이 있지요. 그 사랑이 나 자신을 위한 사랑이었다면 하다못해 칭찬이라도 하다못해 명성이라도 하다못해 작은 보상이라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손해만 보는 일을 아무 대가없이 꾸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속에 녹아있는 진리를 우리에게 공급하셔서, 이와 같은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내도록 도우십니다.

둘째, 성령의 열매는 희락입니다. 희락의 원어는 “카라” 입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이 단어는 특별히 고난 가운데에서,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내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지만, 어려움이 닥쳐오거나 고난이 닥쳐오면 눈물짓고, 한숨짓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성도는 그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구원의 기쁨, 영생의 희망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희락, 카라는 “성도는 매일같이 깔깔거리며 신나게 살아야 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누구도,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깊은 기쁨이 잔잔히 넘쳐흐르는 그윽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히브리어로는 “샬롬” 이지요. 먼저 성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평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분열하려는 육체의 소욕을 누르고 이웃과 화평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 것을 채우겠다는 욕망, 분열을 일으키는 욕망은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충분히 채우신다는 신뢰없이는 쉽사리 멈추기 어렵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우시지 않고서야 “아, 그까짓 거 필요없어, 이만하면 충분해, 필요하면 주시겠지..” 이런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속에는 샬롬이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이기시고 우리의 삶 속에 화평을 이루어 내십니다.

넷째로 오래참음의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날지라도 바로 징계하지 않으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 합니다. 배신자에 대한 관용의 마음, 나를 등지는 자를 저주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악인을 보고 복수하기보다는 선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성령의 열매, 오래참음의 의미입니다.

다섯번째 성령의 열매는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제의 말씀속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6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 단어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내가 죄인되었을 때에 주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자비를 베풀어 구원의 길로 인도 하셨습니다.

또한 구약속 신명기에서는 죄로 인한 광야의 시간을 겪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하였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신 4:31

그래서 이 성령의 열매, 자비는 너그럽게 죄 지은자를 용서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여섯번째 성령의 열매는 양선입니다. 헬라어로 “아가도쉬네” 라는 말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님중에서도 이 양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시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분들을 뵈면 언제나 주변의 분들을 돕느라 바쁘세요. 내 시간 내 힘 내 돈을 남을 위해 사용한다는건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별 생각없이 살다보면 평생가야 남을 돕는 일 한 두번도 하기 힘듭니다. 난 지금 누구를 돕고 있는지, 성도라면 한번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일곱번째 성령의 열매는 충성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 그 사람 분명해. 아, 그 사람 틀림없어” 이런 평가를 듣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덟번째 성령의 열매는 온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온유한 사람” 하면 좀 순한 사람, 얌전한 사람을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원어 “프라오테스” 나 영어해석 (gentleness) 을 보면 그저 부드럽기만 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선과 악을 바르게 구분하며 악함 앞에서 흥분하지 않고 적절하게 화내며 적절하게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훌륭한 판사가 흉악한 범죄자 앞에서 바르게 판단하여 질책하고 화내지만 정신나간 사람처럼 이성을 잃고 함부로 굴지는 않는 모습, 그런 것을 온유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 절제는 성적인 욕구에 대한 절제를 의미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해서 죄의 늪에 빠져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끊어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는 이유로, 성도의 삶 속에는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 보이는 구분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 구원받았음에 증거가 되는 성령의 열매가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풍성히 열매 맺으십시요. 그러나 아직 성령의 열매가 나의 삶 속에 드러나지 않으셨다면, 분명히 예수를 믿는데도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아직 나의 믿음이 씨앗으로만 남아있지 않은가 확인해 보십시요. 혹시 나의 믿음이 아직 꽃피고 열매맺지 못하였다면 나 자신의 믿음을 위하여, 나 자신의 성숙됨을 위하여 더욱 간구하며 더욱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요.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 7:7-8

우리가 구하고 찾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이라면 하나님은 결코 그 간구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