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5장 16-21절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6-21
지난 시간동안 여러번에 걸쳐서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처음에 받아들였던 복음의 가치가 흔들리고 예수를 믿는 믿음에 율법을 더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돌았고, 이에 대한 반박으로 바울은 조목조목 따져가며 우리의 구원이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신 성경구절 갈라디아서 5장 21에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는 구절이 나와서 우리를 조금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 놓고는 이제와서 뭔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뭔가 잘못된 행위를 하면 지옥을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건 마치 뭔가를 지키고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중심의 구원론과 내용만 좀 바뀌었지 도대체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바울은 구약의 율법과는 또 다른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는건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여기 쓰여있는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명령처럼 들리는 이야기들을 여러번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글들을 접할때마다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아니 뭐 이렇게 복잡한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이렇게 많은가.. 이런 일들을 다 따라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자유라는 건가.. 믿음이면 된다더니 요구사항이 너무 많네..’ 하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도 분명히 있으실 줄로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바울이 한 이 말의 뜻을 좀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를 느낍니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많은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17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자, 이 말씀은 무슨 이야기 일까요. 성령과 내가 가진 육체의 욕심이 서로 충돌한다는 거지요. 나의 삶 속에서 말입니다. 이 말씀은 착한 자아와 악한 자아가 싸운다는 이야기가 아니구요,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악한 나의 육체의 욕심이 싸운다는 이야기 입니다.
성령님은 그동안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어 오셨습니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성화를 이루어가며 좀더 온전한 성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간구하며 크신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나를 감싸 안으시고 나를 인도해 가시는데 이와같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으신 17절에 나오는 육체의 소욕이라는 단어에서 소욕이라는 의미로 쓰인 원어 (에피뒤메이) 의 뜻을 살펴보면, 아주 강하게 탐하다 또는 아주 폭발적으로 원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너무 하고 싶다. 너무 갖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든다는 거지요. 바로 그 마음으로 성령과 맞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육체의 소욕들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라디아서 5:19-21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은 15가지의 육체의 소욕들을 열거하고 있는데요. 그 15가지의 일들을 말하기에 앞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의 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다음의 열 다섯가지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뜻으로 썼다면, 바울이 생각하는 육체의 일은 오직 여기 나오는 15가지의 일로 제한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육체의 일을 제한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원어를 살펴보며 원래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의 뜻을 살펴보면, “육체의 일은 분명히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드러나 보인다” 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이해입니다.
우리가 지금 육체의 일, 육체의 소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육체의 일 첫번째의 특징은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행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아, 이 사람은 지금 육체의 일을 하고 있구나, 저 행동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는 일이 아니구나’.라고 쉽게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육체의 일들은 무엇입니까?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음행의 원어는 “포르네이아”로 간음, 간통을 의미합니다.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거나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통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배우자의 고통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동으로 성경 여러곳에서 엄격하게 부정하는 죄중의 죄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극도로 발휘되는 순간인 동시에 이것은 우상숭배와도 연결이 됩니다. 우상숭배의 뿌리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더러운 것으로 쓰인 단어의 원문 (아카다르시아) 은 윤리적 불결과 성적인 불결함을 말합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되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1:28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 2:23-25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이러한 성이 쾌락의 도구로, 돈벌이의 도구로 그렇게 잘못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매춘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일수 있겠지요.
세째로 성적인 죄는 호색입니다. ‘아셀게이아’ 라는 단어를 우리 말로 호색이라고 번역했는데요, 음탕하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성적 타락을 즐기면서도 부끄러운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제 바울은 육체의 일에 대한 두번째 묶음으로 우상숭배와 주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육체의 일은 우리가 가진 기독교와 대치되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우상숭배가 뭔지는 우리가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원어 (에이돌돌라트레이아) 의 뜻을 살펴보면요, “어떤 형상을 섬기다” 라는 뜻인데요, 피조물을 향하여 어떤 절대적 가치를 두면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돌을 향하여 섬긴다든지, 소를 향하여 섬긴다든지, 금신상을 향하여 섬긴다든지, 하늘을 섬긴다든지, 땅을 섬긴다든지, 태양과 달을 섬긴다든지 하는 것들이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우리가 섬기는 모든 것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의지하고 섬기면 나에게는 돈이 우상이요, 내가 나의 능력을 의지하면 나에게는 나의 능력이 우상이요, 내가 나의 지식과 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면 나에게는 나의 지식과 힘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내가 신뢰하며 절대적 가치를 두고 섬기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우상입니다. 구약시대의 수없이 많은 우상들이나 우리 선조들이 섬긴 수없이 많은 우상들, 그리고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조금은 다른 모습의 우상들, 이러한 우상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상숭배에 이어 나오는 주술이라는 단어 (파르마케이아) 에는 약품을 사용한다는 뜻이 있어요. 지금이야 약이 아주 대중적이고 해열제, 소화제 등 참 많고 다양하지만, 오래 전에 약은 참으로 신비로운 물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의 뜻은 신비로운 어떤 힘을 빌려서 나의 삶의 길흉화복을 조절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무당들이 굿을 하는 모습을 보면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뛰지 않습니까. 초현실적인 신비로움이죠. 그리고 그 굿은 왜 하는 겁니까. 길흉화복을 조절해 보겠다는 의미 아닐까요. 이렇다 보니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부적처럼 그렇게 사용한다든지, 헌금이건 예배참여 이건 성경읽기 이건간에 교회에서 하는 여러가지의 일들을 나의 삶 속에 일어나는 길흉화복과 연결하려 한다면, 그것이 곧 주술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피해야할 육체의 일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8가지의 육체의 일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원수 맺는것, 분쟁 , 시기 ,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그리고 투기 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원수맺음의 역사, 분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내가 남보다 더 좋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를 가졌으면 두개를 갖기 위하여, 우리는 수도없이 서로 원수 맺으며 분쟁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기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분쟁이라는 단어 ( ‘에리스‘) 의 뜻이 언쟁이나 다투기를 좋아하는 기질이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가 다투기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기질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 기질 안에는 시기와 분냄과 투기가 있습니다. 이 시기와 분냄과 투기를 땔감으로 사용하여서 더욱 더 다투고 더욱 더 원수를 맺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시기와 분냄과 투기로 원수맺고 다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분열합니다. 어떠한 사회 어떠한 조직도 시기와 분냄과 투기가 중심이 되어 원수맺고 다투면 분열합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것들은 성령의 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육체의 일, 죽음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우리의 육체가 이것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이제 인간관계에 관련된 8가지의 육체의 일중에 남은 2가지를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 성경에 당 짓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 구절의 원문과 영어 성경을 보면, 이기적인 욕망, 이기적인 태도라고 써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무식한 일용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자기 일당을 더 받으려고 품위없이 함부로 나대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가 당을 짓다의 원어 표현입니다. “아, 그 돈 한푼때문에 체면이고 뭐고 없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단이라는 육체의 일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육체의 종교적인 욕심에 속할것도 같은데, 사람과의 관계에 있는 육체의 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단이라는 단어의 원어를 (하이레시스) 확인해 보면 이 말은 어떤 특이한, 또는 특별한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견해를 가진 집단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하지 않고 특이하고 특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그런 모임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이단입니다. 온전한 하나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이지요.
이제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교도들의 생활습관 중 하나인 술취함과 방탕함을 육체의 일로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술취함이라는 단어로 바울은 “메데”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와인 한잔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물이 귀한 사막기후에서 물 대신 식사와 함께 하던 와인 한잔이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약으로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말에서 나오는 의미의 음주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음주입니다. 취하도록 마시는 음주속에는 술에 기대려는 사람의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술을 통하여 기쁨을 얻으려는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술을 통하여 고통을 넘어서려는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 고통을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술을 통하여 이러한 것들을 이루려는 시도가 술취함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술취함 뒤에 나오는 방탕함이라는 단어는 이와 같은 뜻을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내는데요. 방탕함으로 쓰인 원어 (코모스) 는 그냥 술취해서 떠들면서 흐는적 거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술의 신 “박카스” 를 숭배하는 행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술취함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박카스를 섬기는 모습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누가복음 21:34-36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님 역시 술취함을 “메데”라는 단어, 즉 만취함으로 이야기 하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욕심 15가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이 15가지 중에서 몇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단 한가지도 적용되는 일이 없으십니까. 아니, 하다 못해 부부싸움도 안하십니까. 아니, 주변에 있는 사촌이 땅을 사는 일도 전혀 없으십니까. 부러워서 배 아플 일도 전혀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훌륭하신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렇지 못하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분명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1) 라고 되어 있는데요.
15개 중에 한 두개 잘못하는 것은 괜찮은건가요? 그정도면 패스인가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야고보서 2:10) 라는 말씀이 있는데, 바울이 말한 육체의 일, 육체의 욕심이 하나라도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나 성도 여러분,
바울은 새로운 율법의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권면은 율법적인 틀에 박힌 행동강령이 아닙니다. 바울의 권면은 율법적 행위라기보다, 성도의 믿음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있다면 늘상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노상 분쟁이나 일으키고 맨날 화만 내고 있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주인되시면 힘들다고 술이나 퍼 마시고 뭐 좋은 일 없나 점이나 보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런건지 확신이 안드십니까. 제가 여러분들을 안심 시키려고 지어내서 하는 말일까요?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 갈라디아서 5장 21절의 끝 부분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1
한글 성경도 영어 성경도 이 부분이 좀더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못한데요, 원어의 뜻을 보면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육체의 욕심 안에만 머무는 자들은, 습관적으로 이런 15가지의 나쁜 일만 하는 자들은, 육체의 일을 해놓고서도 부끄러움과 회개가 없는 자들은 지옥에 갈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게 맞다는 말씀입니다.
15가지 중에 하나만 잘못해도 지옥갈거다 라는 말이 아니라, 도대체가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전혀 없는 자들은 지옥 간다는 것이 좀 더 올바른 이해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주장은 새로운 율법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때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육체의 소욕이 나를 이끌어감으로 때로는 나를 넘어뜨릴지라도,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참 믿음이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면, 성령님은 분명히 내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서 그 놀라운 생명력으로 이미 십자가에 못 박은 나의 육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부단히 막으십니다. 그 성령의 역사가 살아서 내 안에서 더욱 충만하여지며, 그리고 그렇게 충만해진 성령의 역사는 나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구원, 그 구원의 약속을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함으로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참된 믿음을 가진 참된 성도들은 구원의 약속을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