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5장 1-12절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 5:1-12

여러분은 “자유” 하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와, 자유다!” 이건 무슨 기분입니까?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는 이 자유는 무엇일까요.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자유는 방종과 다르다는 말을 배운적이 있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가 되는 의미지요.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이해되는 자유와 방종의 차이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성경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수도없이 헤매이게 만드는 원인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성경속의 자유를 방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저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데, 이 미국을 대표하는 단어가 뭡니까? 자유 입니다. 왜 미국을 대표하는 단어가 자유가 되었습니까. 미국의 첫 이민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이잖아요. 처음에 미국에 온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왔고 그래서 미국을 상징하는 단어가 자유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청교도들은 누구입니까. 영국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교회 성공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공회는 개신교라고는 하지만 영국 왕이 중심이 되어있다 보니까 매우 제도적이었고 많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맞서는 청교도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칼빈의 주장을 중요시 했고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복음을 중시하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죠. 이런 신앙은 미신적이고, 인위적이고, 인간적이고, 비성경적인 신앙을 비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용표 목사님을 통해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 관한 설교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바로 이것을 만든 사람중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청교도적 장로교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 아닙니까. 이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회를 비판하니까 힘이 있는 국가가 이 사람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죠. 잡아서 고문하고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어려워졌고 그때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온 이 사람들이 바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온 퓨리탄, 즉 청교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교도들은 남들이 보기에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주 금욕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유를 찾아 왔다고 하니까, 언뜻 드는 생각은 내 맘대로 살 자유를 찾아온 것같고, 그래서 미국의 시작은 자유분방하게 사는 나라같지만, 사실 청교도들은 매우 금욕적이고, 매우 성실하고, 매우 말씀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가져온 자유라는 단어의 뜻은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자유가 아닌,
하나님을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 믿을 자유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좀 더 온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이 말씀에서 자유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욕심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해석될까요?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마음대로 살 수 있게 해 주시려고 방종을 주셨으니,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쓰지 말고 다시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네 마음대로 막 살아라’.

정말 말도 안되는 해석이겠죠. 누가 이렇게 생각할까 싶죠. 그런데 기독교 역사속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니까 그 뒤에는 막살아도 되는 것 아니냐며, 어차피 구원을 얻었는데 어떻게 살든지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이 자유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 자유는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무슨 죄를 가지고 있길래 죄 아래 종노릇 한다고 말할까요?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를 가지고 있죠.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죄가 원죄요, 살아가면서 짓는 수많은 죄들이 자범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 유전되어서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끌어안고 태어납니다. 그 원죄는 우리에게 죄성을 유전시켜서 살아가는 내내 죄를 지며 살게 만드는데, 이것이 자범죄입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더욱더 쌓아가며 살아간다는 뜻이죠.

왜 그럴까요? 예수 이전의 우리의 영은 타고난 죄성가득한 육신을 이길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성을 이길 힘도 죄성을 이길 의지도 없는 거지요.

죄라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영적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타고난 원죄를 씻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즉 죄를 안 지을 자유, 죄를 안 지을 힘, 죄에 속박되지 않는 온전한 자유의 영을 우리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이들은, 예수를 통한 구원을 확신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영을 인도하사 죄를 안 지을 자유를 얻게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마음대로 살면서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니라, 성도가 육체의 욕망을 이겨내서 죄를 안 지을 자유를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다는 것입니다.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2-34

이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아 죄를 범하는 자들은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죄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죄의 종된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4

그래서 우리가 얻은 자유는 죄에서의 자유, 즉 죄를 안 지을 자유인 것입니다. 이 자유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무엇인가 좀 더해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과 또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냥 막 살아도 되는것 아니냐는 율법폐기론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죄에서의 자유는 바로 이 율법폐기론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알려줍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맹목적인 율법의 복종 요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성도에게 악에 대한 기준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이 의무가 되고, 그 안에 참된 순종이 사라지게 되고, 형식적이 되고,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과시욕의 수단이 되어버리면서 온전한 율법의 의미는 예수님 오실 당시에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자발적인 율법의 준수는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율법은 구원의 빛이 아닌 고통의 올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율법의 완성, 즉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실현해 내셨습니다.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9-10

모든 율법들은 사랑이라는 주머니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 모든 율법이 들어있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누가 실현해 내셨습니까? 예수님이 실현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완성한 율법, 그 사랑을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나누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어 갖은 성도는 이 은혜로 인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짐이었고 의식법 적이었던 율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유로와 진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를 얻었는데,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구원을 위해서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까 바울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2

그런 것 안받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다 끝났다고 하는데 그리로 다시 돌아가면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심의 희생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럴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뭐하러 달리셨냐는 말이죠.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 5:3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만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신27:26

믿음에 율법을 더하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행위인 동시에, 우리에게 율법을 넘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4


그 권면은 (할례까지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갈 5:8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 5:12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죽음에서의 자유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이 말씀은 이미 죽은 나사로를 보며 슬퍼하던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죽음은 이미 왔어요. 죽음은 아주 견고해서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죽음에서의 자유를 선포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증거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뱀의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을 저지른 아담과 하와.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9

이 일 이후에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매우 확정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 죄의 값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살아가고 모든 인간은 그 죄 값으로 죽습니다. 이런 확정적인 현실앞에 놓여 있는 인간들에게 예수께서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 죽지 아니하리라”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것. 아직은 오지 않았어도 예수의 재림, 영원한 나라의 완성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은 죽음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실현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0-22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자유는 사망에서의 자유,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의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 아주 기초적이고 아주 쉬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아니요, 죄에서의 자유, 율법에서의 자유, 죽음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얻은 이 자유함은 주님을 망각하고 막 사는 자유가 아닌, 이미 얻었으니 대충살아도 될 자유가 아닌, 주님을 더욱 열심히 더욱 잘 믿을 그럴 자유임을 나누었습니다. 지나치게 더하거나 지나치게 빼서 본래의 맛을 잃은 시대에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기본에 충실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얻은 자유함을 누리는 기쁨의 삶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