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4장 21-31장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1-31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요즘은 분명히 다를거라고 생각합니다만 30여년 전쯤 제가 한국에 있을때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약속을 정말 잘 안지켰던 것 같아요. 간단한 약속에서부터 중요한 것까지요. 몇월 몇일 몇시에 어디서 보자 했는데 막상 그날 약속장소로 가보면 안나오고요, 일주일 후에 무슨 무슨 계약을 하자 했는데 막상 당일이 되면 계약이 취소되고요. 이러 저러한 도움을 주마하며 흔쾌히 약속한 그 지원은 그저 빈말에 불과하고요. 안해도 되는 호언장담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던 그 시절, 저 또한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거예요.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책망하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그걸 믿었어?” 라며 책망을 되돌리는 문화, 신뢰할 수 없는 사회분위기, 지금은 분명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제가 경험했던 모습들이었습니다.
신뢰는 한 사람이 굳게 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발판과 같은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다리가 끊어져 있지 않다는 확신이 있어야 악셀을 밟고 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잡은 동아줄이 썩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그 줄을 잡고 절벽을 오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확신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안전해 보이는 길을 찾겠지요. “다리가 끊어진 것 같으면 배를 찾아봐야 되는거 아닌가.. 물이 얕은 곳을 찾아서 그냥 강을 건너가 볼까.. 이 동아줄은 못 믿겠어, 썩은것 같아.. 다른 줄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줄없이 올라갈 방법은 없나.. 어디 가파르지 않은 다른 길은 없나..”
신뢰하지 못하면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믿지 못하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뭔가를 덧붙여야 한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닙니다! 당신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려는 의도는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면 신뢰하며 다리를 건너야 하는 거죠. 예수만이 구원의 통로라고 믿는다면 신뢰하며 그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겁니다. 그 믿음이 없기에 뭔가 다른 것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바꾸어 말하면, 믿음에 뭔가를 자꾸 더하려는 시도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예수 복음을 그렇게 믿기 어려워 하는 것일까요?
자, 여기 평범한 한 가장이 있습니다. 그저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는,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버는 일은 그저 비슷해서 늘 빠듯한 그런 가장이 하루는 배우자에게, 이번 주말에 아주 맛있는 스테이크 사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러면 반응이 어떨까요? 그 약속을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왠일이지.. 왜 이러지..” 하면서도 믿겠죠. 할 만하지 않을까요? 어쩌다 한번이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이 스테이크가 아닌 자가용 제트 비행기를 사주겠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못 믿습니다. 그냥 헛웃음만 나오지 않겠습니까. 왜 못 믿는걸까요? 현실감이 없으니까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심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열광했고 그들은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기대했죠. 예수님이 압제에 놓여있던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내기를 바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던 거죠. 그 일은 매우 현실감 있어 보였던 거예요. 그러나 그 많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늘의 일을 이야기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밝힐 때, 그때 그들은 떠나갔습니다.
왜 떠나갔나요? 현실감이 부족해 보였으니까요.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으니까요.
우리는 수도없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구원, 영생,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구원, 영생, 하늘나라를 예수를 통해 들어간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간단해서 현실감이 없어 보입니다. 차라리 예수 믿으면 만복이 찾아오고, 헌금 많이하면 부자되고, 목사님 잘 섬기면 자녀가 잘되고, 새벽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게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거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은 이런 종류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도무지 신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율법주의자들에게로 기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구약에 나와 있는 하갈과 사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갈 4:22-26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와 그리고 여종 하갈에 관련한 이야기 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아시는 이야기 이지만, 함께 창세기로 돌아가서 무슨 일인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넘어왔지만 아직은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던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는 환상중에 임하셔서 그를 위로하십니다. 이제 그를 위로하시며 상급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묻습니다.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 15:2-3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제법 삶의 형편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많은 나이에도 아직 자녀를 얻지 못하는 아브라함은 좌절스러웠습니다. 그 당시 더욱이 유대인들에게 건장한 자녀는 복 중의 복이고, 상급중의 상급이었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녀를 갖는다는 것은 포기하기 어려운 기쁨이었던거죠.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것, 자녀가 없기에 좌절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4-5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미 꽤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그러나 아직은 조금이라도 자녀를 가질 가능성이 있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아직 매우 모호하였습니다.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믿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알지는 못했던 거죠.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인 사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자신의 현실에 맞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를 가져야 하는 사라는 아브라함 못지 않게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분명히 남편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라고 했는데.. 그래서 사라는 매우 현실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씨면 되는 거지, 꼭 내가 아기를 가질 필요는 없는게 아닌가” 라는 아주 현실적인 해석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그녀는 이런 일을 벌입니다.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 16:1-3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창 16:4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 16:16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현실적인 선택과 행동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이스마엘은 오늘날 모든 아랍인들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탄생 뒤 십여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0
이 말을 들은 사라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속으로 웃었어요.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헛웃음이 나온 겁니다. 현실성이 없으니까 믿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못 믿는데는 매우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죠.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창 18:11-12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이처럼 비 현실적인 약속에 대해 그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라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자가 이렇게 말하죠.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 21:1-3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삭을 얻을 때의 나이는 백세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오래 살았으니까 그 나이에 자녀를 낳는게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시는 분들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미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었다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성을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바울은 지금, 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자신의 주장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인 하갈의 자녀는 역시 종이요, 자유인인 사라의 자녀는 역시 자유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종 인지 자유인 인지를 구분하는 잣대는 사람의 현실적인 이해를 따르는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지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매우 현실적이어 보였던 하갈을 통한 임신과 이스마엘의 출산에 대해 바울은 “..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하고” (갈4:25)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율법의 행위를 더하는 것은 얼핏보기에 매우 현명해 보이는 선택인 것 같아 보이지만, 이미 얻은 자유를 버리고 종의 신분이기를 선택하는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변에서 구원의 요소로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똑같은 금식을 하여도, “아, 나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 내가 내 생명유지에 필요한 이 음식을 잠시 중단하고 하나님께 집중해서 기도하고 싶어” 하는 금식은 자유자의 금식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받은 자유자는 뭔가를 받아내기 위해 금식함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금식안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금식기도,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는 제법 타당해 보이는 행위들, 특별히 나쁠 것도 없어 보이는 그 행위들은 그저 종의 행위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저 의무감으로 기쁨없이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은 행동일지라도, 자유자의 행동과 종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을지라도 종의 행위는 자신도 지치고 힘들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구원의 길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29-30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종의 자녀가 아닙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8).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 4:31). 갈라디아서의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 자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