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4장 8-20절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8-20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우리가 잘 아는 단어중에 입덧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굳이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더라도 이 단어는 참 흔하게 접하는 단어입니다. 남자인 저로서는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전혀 경험 할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끔 주변에서 아는 사람들이 겪었던 입덧을 생각하면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잘 못먹는 정도가 아니더라구요. 헛구역질을 너무 많이 하니까 나중에는 목에서 피가 넘어올 정도가 되더라구요. 산모의 고통이 출산의 순간에만 있는게 아니라 임신 초기부터 피를 토하는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는 거지요.
이런 입덧은 산모들이 왜 하는 걸까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태아의 보호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보통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독성물질에 대한 반응으로 입덧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엄마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온몸으로 독성을 막아내는 거죠. 못먹게 만드는 거예요. 임신 초기의 입덧을 시작으로 산모는 불러오는 배로 인해 많은 불편을 감내해야 합니다. 배가 불러오면 깨어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잠을 잘 때도 여간 불편한게 아닙니다.
그렇게 한참을 고생하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출산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출산의 고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중에 거의 최고 수준의 고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겁니다. 그 흔해 보이는 수 많은 사람들 하나 하나가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태어난다는 겁니다. 아기의 탄생 뒤에 엄마의 고통과 수고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탄생이 이처럼 아기의 탄생과 아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아기가 탄생하는 것과 같이, 모든 성도의 시작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히 감내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성도의 탄생 뒤에 예수님의 고통이 있습니다. 또한 수없이 많은 주의 일꾼들은 오랜 시간동안 많은 역경을 견뎌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듣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도의 탄생 뒤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통의 인내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함도, 또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함도 이처럼 고통스러운 수고로움의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 중에도 엄마가 고생한 것을 알아주는 착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엄마, 나 낳느라 고생하셨어.. 우리 엄마, 나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하는 자녀들이 있단 말이에요. ‘내가 고생한 엄마를 위해 말 잘들어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우리 엄마에게 뭐라도 보답할게 없을까..’ 하는 아이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참 기특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죠. 그런 아이들을 보면 굶어도 배부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함께 나누고 있는 이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그런 아이와 같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3-15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보통 철 없는 아이들이라면 병든 엄마를 부끄러워하기 마련이지요. 엄마가 가난하면 보려고도 안해요. 초라한 엄마는 창피해하기 마련인데, 세상의 눈으로는 형편없어 보이는 그 엄마를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않는 착한 아이처럼, 오히려 병든 엄마를 위해 자기 몸이라도 나눠주고 싶어하는 고마운 아이들처럼, 갈라디아 교회가 사도 바울을 그렇게 끔찍하게 위하고 사랑하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알았던 것이죠, 내 참 생명이 이 사람을 통해서 전해졌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자녀가 새로운 친구를 만났어요. 그 친구의 이름은 ‘율법주의자’ 입니다. 예수님처럼 유대인이고,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서 살았다고 하는 그는 자신이 원조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그가 갈라디아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갈라디아 교인들과 친해지려고 아주 열심을 다합니다. 갖은 호의를 다 제공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신뢰와 사랑에 금이가기 시작합니다.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무언가 더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조금씩 설득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일단 절기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것이 나쁠 것 없어 보이잖아요 오늘날에도 교회들에 따라서 절기를 많이 지키는 교회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들이 지킨 절기는 유대인의 절기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개신교회들이 지키는 절기와는 다른 절기입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 4:10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날은 금식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달은 아빕월, 시브월, 에다님월, 불월등 추수, 꽃, 비 등을 상징하는 월들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나팔절, 수전절, 부림절 등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해는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말하는 것이죠.
이렇게 복잡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챦아요, 처음엔 좋은 의미로 시작했던 행사도 막 정신없이 바쁘게 진행하다 보면, 그 참 뜻은 사그러들고 분주함만 남지 않습니까.
더욱이 그 많은 일들을 늘상 해오던 유대인들도 아닌 이방인들인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오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다 보면,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지 않겠습니까. 그 많은 형식들은 갈라디아인이 본질을 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구원받음의 기쁨과 감사는 감소하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하는 의무와 부담감은 증가했습니다.
예수를 통해 완전히 열려있던 하나님과의 소통의 통로를 날이라는 벽돌, 달이라는 벽돌, 절기라는 벽돌, 해라는 벽돌로 차곡 차곡 쌓아 올려서 또 다시 장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뭔가 더 있어야 한다는 말에 흔들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8-9,11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자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고, 교회에는 놀러라도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한국적인 샤머니즘과 오랜시간에 걸쳐 익혀온 세상 철학과 한참 유행한다는 최신 처세술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느날 참으로 신실한 목사님을 만나서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무도 초라해보이고 심지어 몸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 사람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가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임한거지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그 말씀이 오랫동안 몸에 베어왔던 샤머니즘적인 사고, ‘재수가 있네 없네’ 하던 그 생각들을 지워버립니다. 오랫동안 신뢰해 왔던 수없이 많은 주장들, 철학들, 그것들의 헛됨을 발견하게 합니다. 신념처럼 가져왔던 많은 처세술, 그런 삶의 방식들을 아낌없이 버리게 만듭니다.
그러고 그 초라하고 몸 조차 불편한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그 말씀에 힘입어 하나님께로 날마다 날마다 더욱더 더욱더 나아갑니다. 그러다 이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아주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을 만납니다. 신앙에 대해 아주 꿰고 있는 것같아 보이는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주장을 듣는 거예요.
구원받으려면 이것도 해야하고,
구원받으려면 저것도 해야하고,
구원받으려면 절기도 지켜야 하고,
구원받으려면 금식도 해야하고,
구원받으려면 충분히 선행도 해야하고,
구원받으려면 죄도 완전히 끊어내야 하고.. 그리고 그리고..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초라한 목사님의 말은 너무도 쉬어보이는 거죠. 그렇게 쉬울리가 없다는 의심이 생기는 겁니다. 믿음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고 뭘 자꾸 더해야 한다는 주장, 오래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의 주장에 신뢰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그 사람의 말을 듣기 시작하는 거죠.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의 상태가 이런 거예요. 지금 스스로 좋은 크리스천 이라 생각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자 이쯤 되면 바울의 마음은 어떨까요. 처음부터 말을 못 알아 들은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복음을 거부한 것도 아닌 갈라디아교회 사람들. 너무나도 따뜻하게 자신을 환대하던 이 사람들의 변화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너무 가슴 아픈일이 아니었을까요. 어려서부터 말도 잘 안 듣고, 말썽이라는 말썽은 다 피우고 하는 아이들한테는 부모도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원래 나쁜 사람한테는 별로 기대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려니 하죠. 하지만 착한 자녀가 갑자기 삐꾸로 나가는 일은 참 성격이 다른 거지요.
이처럼 바울의 기대와 기쁨은 어이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처음부터 영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기대도 없었을텐데, 처음부터 도무지 복음을 기뻐하며 반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슬프지까지는 않았을텐데, 그 슬픔에 그 답답함에 바울이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 4:16
산모가 아무리 출산통에 시달려도, 아이를 낳느라 죽다가 살아났어도 앙앙 우는 아기를 보고 웃습니다. 그 애기가 엄마한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그 애기가 엄마한테 미역국 한 그릇이라도 끓여줄 수 있겠습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사줄 수 있겠습니까. 그냥 먹고 싸고 울고 자고 하지요. 그런데 그 엄마가 아기를 보고 웃는 겁니다. 아기의 존재자체가 엄마의 기쁨인 것이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존재 자체는 바울의 기쁨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기쁨이된 그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참된 말을 전했는데, “아, 무엇인가 더 필요해. 믿음만 가지고는 안되는 건데. 하마터면 속을뻔 했쟎아..” 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바울을 미워하는 거예요. 바울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모든게 다 성도들을 위해서 한 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까요. 한탄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제 바울은 비장한 각오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갈 4:17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요,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자기 자신을 향하는 순간 그 말씀은 썩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잘먹구 잘살려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세상 연기같은 한 줌도 안되는 인기와 영광을 얻어보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재료로 해서 불량식품같은 엉터리 범벅을 만드는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말씀을 받을 사람들의 구원에만 집중하고 말씀을 전해도 온전한 진리가 들어갈까 말까 한데, ‘이 말씀 잘 전해서 내가 무슨 이익을 볼까.. 내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어떻게 더 잘될까..’ 하며 말씀을 전하면요, 그냥 가짜만 전하게 되는 겁니다. 그냥 사람들 입맛만 맞추게 되는 거예요.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헛된 가르침을 열심으로 전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여러분! 그 사람들을 따라가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삯꾼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삯꾼이 이끄는 교회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건강한 진리의 말씀이 넘쳐나지 않습니다.
자, 그런데 한편으로 바울이 이렇게 애쓰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이지 않나요? 어렵게 산모의 고통을 감내하며 갈라디아 교회를 잉태하고 키워냈는데, 이렇게 엉뚱한 반응이 나오면 보통사람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저주받을 자들아, 잘먹고 잘살아라. 지옥에서 이를 갈며 울부짖음이 너희들의 미래에 차고 넘치리라..” 하는 저주를 퍼부으면서 떠날 만도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 역시 안되는 거였구나.. 복음은 아무나 받는게 아니구나.. 내가 사람들을 잘못봤구나..” 하면서 조용히 물러서는게 맞지 않을까요? “여기는 아닌가 보다..” 하면서 떠나야죠.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이 영 만족스럽지 않으면, 좌절하고 실망하다 못해 미워하기까지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마음 아닙니까. “나는 전했으면 그만이고 믿는 건 너희들 몫이다.. 너희들이 악해서 복음을 못 듣는 것은 어쩔수 없지..” 이런 마음 들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건 바울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엄마의 마음이 아닙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바울이 갈라디아아 교인들을 향해 뭐라고 하고 있냐면요, “나의 자녀들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름은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아니, 우린 분명 하나님의 자녀인데 갑자기 바울이 우리를 향해 “나의 자녀들아” 한다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바울의 자녀입니까?
그럴리가 없죠. 사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쓴 ‘테크나 무’ 라고 쓴 “나의 자녀들아” 라는 표현은 오직 여기서만 딱 한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속에서 이 단어는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기에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이죠.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뒤에 나오는 구절이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헛된 것을 전하려 열심을 다하는 율법주의자들과 달리, 조금전 바울이 경고한 그 사람들과는 달리, 사람들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삯꾼 목사들과 달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아기의 존재만으로 기뻐하는 산모와 같이 순수한 열정으로 순수한 사랑으로 성도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고통을 언제까지 감내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까? 하루, 한달, 아니면 1년, 2년, 언제까지 하겠다고 그러죠?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기까지” (갈 4:19).
성도안에 들어온 말씀은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어서 엄마 뱃속의 태아가 자라나듯 그렇게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사람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나 형식적인 율법을 지킨다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요, 믿음이 살아있다면 자라나고, 자라난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성도를 통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룰때까지 바울은 산모의 역활을 감당하겠다는겁니다. 엇나간 자녀, 기대에서 벗어난 자녀를 엄마가 버립니까? 입덧하고 배가 불러 불편하다고 산모가 태아를 끊어 냅니까? “너, 이거 잘못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내 아들 아니야. 그러니까 더 이상 내 딸 아니야” 합니까? 그렇게 어렵게 낳고 앙앙 울어대도 존재 자체가 기쁨인 자녀를 그렇게 버립니까? 그럴수는 없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성도를 품은 자신의 마음을 엄마의 사랑으로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나누신 이 말씀들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왜 이렇게까지 애를 쓰고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구원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해하시는 은혜가 넘쳐 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