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4장 1-7절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 4:1-7
아주 오래전 제가 대학생일때 서울에 있는 어느 고아원을 봉사차 몇번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때 아버지를 잃었으니까, 부모를 갖지 못하고 단체 생활을 하던 그들을 보면서, ‘우리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 컷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갔죠. 고아원마다 또 고아들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때 제가 만난 아이들은 정말 나이스 했어요. 보통은 어린 아이들이 남들 신경 안쓰고 자유롭게 뛰놀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막 떼쓰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들은 전혀 그런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얼마나 얌전하고 얼마나 차분하고 얼마나 말을 잘듣는지 몰라요. 분명히 아이들 수십명을 만나고 왔는데, 전혀 힘들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 아이들을 낳아서 키워보면서, 그때 그 아이들이 보통 아이들과는 참 달랐다는 걸 알게 됬습니다. 제가 지금, 모든 고아원의 아이들이 다 똑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는 거죠.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천방지축으로 뛰노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은 뭐가 다른 걸까요? 믿는 구석이 있고 없고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있고 부모가 없고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정확히 그렇게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린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렇게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누구에게 잘 보여야지만 빵하나 더 먹을 수 있고, 누구에게 잘 보여야지만 장난감 하나 더 받을 수 있다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유롭다 못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갈라디아서 4장 6절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아빠 아버지”.. 우리가 아는 그 “아빠” 인가요? 어린 아이들이 아빠, 아빠, 하는 그 아빠 인가요? 여기 “아빠” 라고 쓴 단어는 아람어 “압바” 라는 단어를 소리나는 대로 읽어 놓은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봐도 Abba Father 라고 써 놨습니다. 이 단어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단어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배우는 첫 단어이기도 하죠. 아주 순수하고, 깊은 친밀감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이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빠, 아빠”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 4:4-5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랜시간 유대인들을 정죄했던 율법. 도무지 다다를수 없는 율법의 요구에 갇혀있던 사람들과 이방인 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아들의 명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빵하나 얻으려고 눈치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장난감 하나 얻으려고 얌전한 척 숨죽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아버지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서는 “아들의 명분” 이라고 나옵니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5)”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들은 ”휘오데시안”, 그러니까 양자를 이야기 합니다. 아들이긴 아들인데 양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말입니다. 고아같던 우리가 양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어떤 분들은 “양자됨 그거 뭐 그렇게 특별한 건가요?
구약에서는 진작부터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 않았나요.. “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요, 생각보다 그런 구절이 별로 없습니다. 구약의 몇몇 구절이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갈라디아에서 말하는 나의 아빠, 나의 아버지와는 정말 결이 다른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오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엄두도 못내고 있었습니다. 어디 감히 불경스럽게.. 하는 분위기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감히 쳐다보기도 두려운 그분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 하고 부르듯이 우리도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거지요. 내가 아주 열악한 고아원에서 희망도 없이 슬프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고 아무 힘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데.. 왕중의 왕이 오셔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뿐인 아들 예수의 핏값을 지불하시고 나를 양자로 삼으셨어요. 그래서 은혜요, 그래서 감사일 뿐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예요.
자, 그럼 이제 내가 양자로 입양되어 왔는데, 입양되기 전에는 무엇하나 마음대로 구할 수도 없었는데, 그저 두려움에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이제 아빠가 생겼으니까 뭔가 좀 바뀌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아니, 아버지한테 뭘 구해야 하는지 알아야지요. 아버지가 뭘 주실 수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를 입양한 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란 것을 알아야겠지요.
이렇게 나를 입양하신 아버지를 아는 것은 사실 성경을 통하여 자세히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중에서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하여, 나의 아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것이며 무엇을 기대해도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마태복음 6장 9절로 부터 시작되는 이 본문은 예수님이 알려주신 기도요,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잘 알고 있는 성경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구절들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원문에 쓰인 단어를 좀더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는데요, 말하자면 “하늘에 계신” 의 원문은 “하늘들에 계신” 입니다. 하늘과 하늘들은 분명히 다르죠. 하늘들이란 온 우주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영역을 뛰어넘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아빠입니다. 내 아빠인 동시에 우리 아빠입니다. ‘아, 나한테 형제가 있었구나..’ 그렇죠 나 혼자만 입양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빠 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말의 원문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옵소서” 입니다. 이름은 존재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세상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인간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짙은 안개로 가리워진 듯한 하나님 존재의 그 존귀하심이 드러나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거룩함이 온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길 바라는게 정상 아닙니까? 내 아버지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분노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오물처럼 더러워져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나타나 보여지지 않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조롱을 받습니까. 심지어 욕으로도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때가 오면, 세상 끝날이 오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
에스겔 38:16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말함이고, 그렇다면 자녀된 우리는 이 마지막 때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 6:10)
이 구절의 원문은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 입니다.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그 이름이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 하는 말이죠.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예수 재림후의 땅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만 봐도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 끝날을 기대하라는 말입니다. 세상 끝날에 다시 살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가득하기를 소망하는 것이 양자된 도리구나.. 예수 재림을 기대하는 것이 옳바른 것이구나..”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라고 하면서도 예수 재림에 대해 관심이 없다.. 마지막 날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러면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원문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또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1 ..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것은 성도들의 구분된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늘과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사람이 이루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양자된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실 이 모든 일들을 바라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바람과 나의 바람이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바람이 아들의 바람이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성경은 좀더 구체적으로, 양자된 우리가 이곳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 아빠 아버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1)
여기서 “일용할” 이란 단어가 참 인상적인데요, 이 단어의 뜻은 “존재하기 위한“ 이라는 뜻입니다. 가끔 어떤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께 물질적인 것을 구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생각합니다. 또 반대로 어떤 성도들은 물질적 풍요를 당연하다는 듯이 구하기도 합니다. 뭐가 맞는 것일까요. 양자된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구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까? 우리의 육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하게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들, 생존에 필요한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당당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빠 하나님은 그것을 충분히 해주실 수 있을 뿐더러, 구하여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양자로 들어왔으면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2)
사실 이구절은 아주 난해한 구절입니다. 특히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표현도 살짝 차이가 납니다. 얼핏 잘못 이해하면, “내가 남들을 용서했으니까 날 용서해 주세요..” 로 들릴 수 있는데요. 그럼 조건을 거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조건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해석은 가장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해석입니다. 그것보다 바람직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나를 양자 삼아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내가 너무 기뻐서 내가 변했습니다. 나에게 죄 지은자들, 이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기쁨으로 내게 죄 지은자를 용서하는 것과 같이, 아빠 아버지께서 오늘 내가 지은 모든 죄들도 용서해주세요..” 하는 말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자녀된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13)
이 말씀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항상 이기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미 구원 받았으나,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는 그 이유로 해서 수도 없이 많은 순간, 죄에 노출되지 않습니까. 수도 없이 사단과 맞닥들여지지 않습니까. 사람은요, 사탄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나 이거 못 이겨요.. 아버지, 나 육신의 요구 못 이겨요.. 아버지, 나 악한 유혹을 넘어설 수 없어요.. 내 힘으로는 안되요.. 마약도 도박도 음란도 나는 이길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아버지. 아버지의 힘으로 막아주세요. 나를 지켜주세요.” 이런 간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자인 이유로 아빠 아버지께 이것을 기대해도 된다는 겁니다. 도와 주시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의 뜻은 나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의 일상과 생존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기쁨으로 남을 용서하며, 아버지께서 흔쾌히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비록 육신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빠 아버지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양자 삼으신 분,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끝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은 우리 양자됨의 견고함입니다. 간혹 성도들은 양자됨의 견고함을 의심하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파양되면 어쩌나.. 다시 내쫓기면 어쩌나..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 23:19
우리의 양자됨은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선택하심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삼은 것을 결코 후회하지도 않느시며, 어느 누구도, 어떤 무엇도 우리의 양자됨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우리 양자됨의 견고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힘입어 양자됨의 기쁨과 양자됨의 확고함을 마음껏 누리시는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의 삶 속에 차고 넘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