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3장 6-14절 ]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6-14

한 해의 시작인 새해가 되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는 뭡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장 대중적이죠. 비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건 흔히 쓰는 말입니다. 아주 이쁘고 통통한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 참 복스럽게 생겼다”. 복과 관련된 단어는 참 많죠. 웃으면 복이 와요, 복을 타고났다, 반대로는 복이 없다, 박복하다.. 먹을 복이 많다, 먹을 복도 없다, 복이 달아난다,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 복을 간직하다, 복을 기원하다, 복권까지. 복과 관련된 말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 뿐만 아니라 중국사람들도 복이란 단어를 아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중국사람들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미국에 있는 어느 중국식당을 가봐도 식당 어딘가에 복자가 써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복은 그렇다면 성경속에는 안나오는 단어일까요? 복이란 단어는 미신적이어서 성경은 그 단어를 쓰지 않을까요? 아니죠. 우리가 방금 함께 읽으신 갈라디아서 본문에도 복이란 단어가 있지 않습니까. 성경속에도 복과 관련된 단어는 수도없이 등장합니다. 성도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단어 복음, 그것도 복된 소식 아닙니까.

자, 그렇다면 우리는 “복” 을 무엇이라 생각할까요. 돈 많이 버는 것, 부자되는 것, 사업에 성공하는 것, 유명해지는 것, 명성과 명예를 얻는 것, 장수하는 것,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 것, 능력있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 착하고 아름다운 배우자를 만나는 것, 자녀들이 잘 되는 것 등등,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뭡니까. 주로 이런 것들이죠. 그렇다면 성경 속에 나오는 복, 특별히 오늘 함께 읽으신 갈라디아서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복은 무엇일까요. 믿음을 통한 구원, 은혜를 통한 성령의 임재를 이야기하던 바울은 지금 왜 갑자기 아브라함의 복을 이야기 하는 걸까요.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되다” 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고 공감하는것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 읽으신 본문에서 바울은 종종 복이라는 단어의 반대말로 쓰이는 저주를 말합니다. 보통 우리가 느끼기에 저주라 하면, 망하든지, 다치든지, 죽든지, 병들든지, 버림받든지 등등인데요,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어떤 저주일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저주를 말하는 걸까요? 이 내용을 아는 것도 또한 복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하는 저주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속에서 살아가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이유로,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8절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갈 3:8

성경은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 말하자면 물질적인 세상적인 풍요와 성공에 대하여도 복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상적인 망함을 저주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것들을 항상 복으로만 항상 저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넉넉하게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부어주시는 은혜는 어떻게 보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죠. 또한 악한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앞에 세상에서 심판을 받고 망하고 죽는 저주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갈라디아에서 말하고 있는 복, 아브라함을 통하여 받는 복을 세상적인 복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주 손쉽게 모순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음, 복된 소식은 무엇입니까?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7-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8

이 구절들을 좀더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 만민 중 하나인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제법 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브라함 때문에 받는 복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꽤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브라함 때문에 받는 복은 장수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삼백명이 넘는 사병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였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브라함 때문에 받는 복은 권력을 가지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9

라고 성경에 분명히 적혀 있는데, 믿음이 있는데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데도 장수하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데도 평생 남 밑에서 이래라 저래라 지시만 받고 살다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거죠?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아브라함과는 영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뭡니까. 믿음이 부족해서,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만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서, 그래서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요? 남들 만한 믿음을 갖지 못해서, 열심이 부족해서, 가끔 주일예배를 빼먹어서, 가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못되게 굴어서, 금식기도는 도무지 한적이 없어서, 그래서 저주를 받고, 망하고 실패하고 아픈걸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음, 믿는 우리가 아브라함과 함께 누리는 복은 그런 복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복은 세상의 풍요도, 세상의 건강도, 세상의 명예와 영광도 아닙니다. 그것에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복음,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에서 말하는 복은 구원을 받는 것이요, 갈라디아에서 말하는 저주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 13:44-46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은 마치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와 같습니다. 극히 값진 진주와 같습니다. 그 가치는 세상 모든 것보다 훨씬 귀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얻은 복은 바로 이러한 복입니다.

구원 , 영생의 복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 넘습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를 더하여도 구원, 영생의 가치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가진 성도는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더욱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큰 것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현실에서 참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배고프고 추운 홈리스와 비슷한 처지의 성도에게 당신은 “재벌보다 복됩니다” 하면 귀에 안들어 가겠죠. 병들어 죽어가는 성도에게 “당신은 건강한 국가대표 선수보다, 금메달리스트 보다 복됩니다” 하면 믿을 수가 없을수 있겠죠. 혼자 남겨진 것같고 아무도 자기에게는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아서 외로움에 고통받는 성도에게 “당신은 유명 연애인보다 더욱 복됩니다” 하면 정말 잘 공감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내게는 없는, 남들이 가진 것들이 부러울 뿐인거죠. 내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들이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내 앞에 있어도 비바람이 몰아치고 태풍이 몰아치면 잘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더 힘을 내서 선포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믿는 자에게 주신 복, 영생의 복, 구원의 복, 천국의 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선포하며 성도 서로가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복됨을 힘입어 세상을 함께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 3:14-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복된 자들 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미 받은 자들 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부요한 자들 입니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천국약속, 구원을 얻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복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얼마나 대단했길래 그 복을 얻었습니까.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누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까. 갈라디아서의 설명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 3:6

이 말씀은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기초로 한 말씀이지요.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5-6

뭔가를 해야지 의로와지고 뭔가를 해내야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앞에서, 유대인의 뿌리이자 가장 중요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는지를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느니라”

율법은 아브라함 때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습니다. 율법 없이는 의로와질 수 없다는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율법 없는 그때에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 복음을 믿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임을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 3:7

아브라함이 받은 의롭다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복,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복, 구원의 복은 믿음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자 이제 갈라디아서는 복에 이어서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당연히 구원받지 못하는 저주를 말하는 것이겠죠.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율법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일까요? 그래서 사람들을 저주 아래로 몰아가는 걸까요? 그게 아니죠.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누구든지.. 모든 일을.. 항상”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지어내어 한 말이 아니라 신명기 27장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 성경을 보면 신명기 27장 26절은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라고 되어 있어서, 모두 실행한다, 항상 실행한다는 표현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실행을 가볍게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실 원문을 살펴보면 이 율법의 실행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항상 굳게 지켜낸다” 라는 뜻을 담고 있는 원어 (야킴) 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원문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죠.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데, 그땐 이래서 못했어요, 저땐 그래서 못했어요.. 이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벗어남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아는 것처럼, 사람이 누가 그렇게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믿음을 가지고 100년을 산다고 해도 하루 이틀은, 아니 한두 시간은, 그것도 아니면 1, 2초는 잘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율법의 기준으로는 100년을 사는 동안에 99년 11개월 30일 그리고 23시간 59분 58초 동안을 완벽하게 율법을 지킨다 해도 마지막 2초동안 항상 지켜야 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다면, 뭔가를 잘못했다면, 단박에 죄를 짓고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냥 그 기준으로는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살아가는 자들은 저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갈 3:11)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진리인데, 유대주의자들이 또 다시 율법을 행하여 구원에 이르자고 주장을 하니, 바울이 “그거, 죽으러 가는 길이야. 그 길로 가면 반드시 죽어. 그 길은 죽음의 길 저주의 길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길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갈 3:11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게 뭡니까. 원문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서, “의인은 계속하여 믿음으로 살것이다” 라고 해석할수도 있고요, “믿음을 통하여 의인이 된 사람은 살것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해는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은 계속하여 의인으로 삶으로서 살 것이다” 라고 이해합니다. 그 이해가 어찌되었건 간에, 사도 바울은 “믿음 – 의인 – 구원” 이라는 단어를 “율법 – 행함 – 구원” 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려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앞에, “그리스도 – 십자가,저주 – 속량함” 이라는 단어들을 제시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얻은 참된 복이며 그 소식이 복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4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과 저주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우리들의 삶 속에 날마다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