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3장 1-5절 ]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 3:1-5

최근 3년간 우리는 코로나라는 엄청난 전염병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일은 정말 영화속에나 나오는 일, 역사속에나 나오는 일 같은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가까운 지인들이 목숨을 잃고 아주 아주 조심을 하고 사는데도 코로나 균에 감염되어서 한참동안 많이 아프기도 하고, 후유증이 생기기도 하고, 손가락이 건조해서 갈라질 정도로 손 세정제를 발라도 늘 불안함은 떠나지를 않고, 모든 일상들이 무너지고 참 어렵고 불편하고 힘든 그런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데요. 그 많은 생각 중 하나는, 내게는 보이지도 않는 이 공기가, 맑고 깨끗한 공기가 참 중요하구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던 이 공기, 그 중에서도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공기, 코로나 균이 날라다니지 않는 그런 좋은 공기가 그게 나에게 참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성경은 수도없이 하나님의 영, 성령을 말합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영을 살리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부어주시고 주를 알고 주를 믿으며 주를 사랑하게 만드시며 성도를 성도되게 이루어주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안겨주시며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위로하시며 강건케 하시며 때로는 한없이 담대히 만드시며 때로는 한없이 포근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그 성령님은 진리되신 예수를 알게 하시고 진리되신 예수를 확신하게 하시며 보이지 않는 천국을 기대하게 하시고 보이지 않는 약속을 굳게 잡게 하시며 날마다 간절함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내가 모르는 나의 필요를 먼저 아셔서 나를 위해 간구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로하여금 분투하게 하시는 놀라우신 성령님. 참 고마우신 성령님은 그렇게 우리 속에 날마다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이런 성령님에 대하여 수도 없이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러나 공기처럼 우리의 눈에는 도무지 형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로, 보기 전에는 믿을수 없다고 한 예수의 제자 도마와 같이, 성도라고 하면서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성령의 이야기만 꺼내면 마치 샤머니즘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들을 바라보듯 짐짓 거부반응부터 보이는,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는 복되지 못한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 무사히 숨쉬고 있는 것 자체가 맑은 공기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듯이, 십자가를 알고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인데도, “성령이 뭐야? 그게 뭔데? 방언은 뭐고, 예언은 뭐고, 은사는 뭐고 그게 다 뭐야?” 이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으신 갈라디아서 3장 1-5절의 말씀은 이러한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떠남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구절들을 통하여 성령님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루살렘에서 갈라디아까지 가기 위해서는 국경근처 두로와 시돈을 거쳐 길게 뻗은 시리아땅을 지나, 길리기아를 넘어가야 나오는 땅입니다. 먼 거리입니다. 1000km가 넘어가는 거리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걸어서 한달가까이 가야 갈수 있는 거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 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어떻게 다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이 그런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밝히 보이거늘” 로 해석된 원어 (프로에 그라페) 는 공시되다, 다시 말해서 “공공연하게 공표하다” 라는 뜻입니다. 공시라는 말의 뜻을 아시죠. 주로 공공기관이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대중에게 알릴 때 공시한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공시된 내용을 진짜인가 거짓인가 말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죠.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회에 있고 지금 바울로부터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심을 마치 공시된 사실을 믿는 것과 같이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아.. 예수님이 죄없이 십자가에 달리셨구나
아.. 내 죄 때문에 죄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구나
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구나
아.. 예수의 대속으로 내가 살았구나

하는 사실을 공시된 구절을 보듯 확실히 보았다는 겁니다. 확실히 알았다는 겁니다.

성도의 시작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보는 것, 남들은 그만두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예수를 명확히 보는 것,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시작입니다.

교회를 10년을 다니고 20년을 다니고 30년을 다녔을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내 눈앞에 공시되지 않는다면, 밝히 보이지 않는다면, 길가다가 남의 발만 살짝 밟아도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러는 우리가 내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아무런 감정도 올라오지 않는다면..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신 독생자 예수님에 대한 아무런 감격도 없다면.. 그냥 덤덤히 그랬나보다 싶다면..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그건 아직 시작도 못한 겁니다. 그렇다면 오랜시간 교회 주위를 맴돌고, 심지어 직분도 받고, 성경도 여러번 읽었는데, 시작이 안되는 이유는 뭡니까. 시작도 안했는데 계속 머무는 이유는 또 뭡니까.

여러분 저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은 “아는 것을 확신하는 것” 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단어는 아는 것과 확신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죠. 저는 지금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우리들의 일상에서 믿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입니다.

자, 그렇다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우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는 알아야겠죠. 성경을 통해서, 전도를 통해서, 설교 말씀들을 통해서, 여러가지 기독교 서적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확신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이 나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일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아, 이제 믿어야지..” 이런다고 우리 마음과 우리 영에 확신이 생깁니까. “이제부터 열심히 교회가야지” 그런다고 예수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에 확신이 생깁니까.

성경을 통독하고 심지어는 성경을 해석할 만한 지식이 있어도 마음에 확신이 생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마음에 확신이 없어도 사람의 열심으로 문화생활 하듯 사회생활 하듯 10년이고 20년이고 30년이고 교회에 나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확신인 믿음은 그러나 시간이 쌓인다고 노력한다고 생겨나는게 아닙니다. 예수를 확신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갈라디아서 3장 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여러분 이 구절에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 는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대속과 구원, 그것을 확신하는 것은 성령님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성령님이 아니고는 내 맘에 그리고 내 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님이 아니면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누구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 는 말은 이미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이미 밝히 본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은 이미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와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한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씀이겠죠. 그런데 이들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거짓 선생의 꾐에 넘어가니까 사도 바울이 “너희들 참 어리석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성도의 시작을 도우신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성도안에 머무시는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2

저는 방금 성령님을 통한 믿음의 시작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성도들을 믿음으로 시작하게만 하시고 우리를 떠나 가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일회성으로 끝나는 겁니까? 그럴리가 없지요.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6-18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약속이지요. 이 말씀은 명확하게 성령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렇게 오신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로마서 10장 9절과 17절의 말씀을 보면,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9, 17

자, 여러가지 성경말씀을 보았는데, 좀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롬10:18).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이제 그는 믿음의 사람, 성도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된 그에게 예수께서는 고아와 같이 놔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삶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를 성도답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도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게 오신 성령님은 내 안에서 어떤일을 이루어 내십니까.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결국 성도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이 율법 안지키면 큰일나는데.. 주일날 예배 안드리면 벌 받을텐데.. 십일조 떼어 먹으면 도둑질 하는거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망할텐데..”, 이거 잘못하면 이렇게 혼날텐데.. 저거 잘못하면 저렇게 혼날텐데.. 이런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무엇을 강조합니까. 주일 성수 하라. 헌금하라. 봉사하라. 구제하라. 새벽기도 나와라. 수요예배 나와라. 금요예배 나와라. 성경 통독 하라. 술 마시지마라. 담배 피지마라. 도박 하지마라. 음란하지 마라. 남의 것 탐내지 마라. 교만하지 마라. 이것해라, 저것해라, 이것 하지마라, 저것 하지마라.. 한참을 듣다보면 “아, 율법하고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또한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는데, 오늘날 교회의 수많은 가르침들이 과연 쉽고 가볍습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이나 모으려고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모두 잘못된 것만 요구하고 있는 걸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말씀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문제는 해라 말아라의 내용이 아니죠. 그것을 내 삶속에서 어떻게 이루어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 안에서 맞고 틀림을 분간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배우게 해 주십니다.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율법적으로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분간이 됩니다. 그렇게 좋아 보이던 나쁜 것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역겨워 집니다. 굳이 율법으로, 의무감으로 꽁꽁 묶어놓지 않아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려고 하다가도, “아, 이거 예수님이 좋아하실까?” 이런 생각이 안들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충만하시면, 의무감을 팍팍 주면서 무엇을 꼭 하라고 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들을 해내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보다 중요해집니다. 의무감이 아닌 기쁨으로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게 됩니다. 억지로 의무감으로 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또 한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의무감으로 하는 일들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카운트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구원은, 구원을 위해 몸부림치는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성령님과의 행복한 동행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것을 가지고서도 갈라디아 교회는 다시금 율법에 목을 메고 있으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라는 질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과 동시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세상에서 겪는 고통조차 기쁨으로 이겨냈음을 상기시킵니다.

갈라디아서 3장 4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4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기쁨으로 고난을 이기지 않았느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주저함없이 손해를 선택하지 않았느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속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은 자로 영적으로 부유한 자로 살지 않았느냐.
그 모든 것을 성령님과 함께 누리지 않았느냐.
그 모든 것이 과연 헛된 일이냐.
이 모든 일들이 성령의 역사 아니냐.
그런데 너희가 율법을 가져와서 성령을 밀어내려 하느냐.

끝으로 갈라디아서 3장 5 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 3:5

성령님이 오셔서, 그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성도됨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분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믿음을 주심과 동시에 믿음을 유지시키신다는 말입니다. 자, 이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데, 당연히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여기 본문에 쓰인 단어 ‘성령을 주시고 (에피코레곤)’의 원어를 살펴보면, 성경속에 나오는 율법을 주시고 (디도미) 에 쓰인 단어와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이 “주시고” 라고 번역을 하기는 하는데, “성령을 주시고”에 쓰인 단어는 “값없이 주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거저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요? 뭔가 의무감으로 애쓰는 자에게요? 형식적으로 성도인 척 하는 사람에게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선해지려는 사람에게요? 행함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자에게요?
아니죠!

듣고 믿는 자에게 입니다.
듣고 믿는 자에게 성령을 거져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율법의 행함이 아닌, 맹목적인 행함이 아닌, 예수를 듣고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거져 주어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우리가 뭔가를 해 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두려움에 율법을 붙잡으려한 갈라디아 교회와 같이 아직도 믿음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으십니까.
성도 여러분,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구원은 내가 빚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있는 그것을 듣고 믿음으로 거져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맹목적인 행위와 율법이 아닌 성령의 충만함 임을 아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제 안에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 안에서 자유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