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2장 19-21절 ]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1:19-21

미국의 여러 도시 여러 곳들을 다니다 보면 “주인 바뀌었음” 이라고 써놓은 광고를 보게 됩니다. 식당이 되었건 상점이 되었건 기분 나쁜 경험이 있으면 다시는 안가게 되잖아요. 그런 나쁜 경험들이 모이면 가게들이 망하곤 하죠. 요즘은 인터넷에 리뷰를 남기게 되어있어서 사람들이 경험들을 공유하기가 아주 쉬워지다 보니까 안되는 가게들은 아예 헤어나올 길이 없게 되는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유일한 탈출구가 뭡니까? “주인 바뀌었음”.

뉴욕에 어느 지하철 입구 가까운곳에 조그마한 상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작은 가게에 수만가지의 아이템들을 깔아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 가게가 오래 되다 보니까 사람이 지나다니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고. 조명도 어둡고, 새로운 것을 사다놓을 공간도 없고, 그러다보니 상품들은 다 오래 됐고 칙칙하고 지저분한 가게가 되었어요. 이런 가게가 장사가 잘될리가 없었죠. 정말 그 가게는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가게 주인은 이름만 사장님이지 마치 부랑자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었어요. 의욕도 없고 불만 투성이고 공연히 손님들하고 싸우고 하루하루가 고통인거예요. 자기도 고통스럽고 남들에게도 고통을 나눠주고 있었죠. 그러다 그 가게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참 겸손하고, 성실하고, 똑똑한 주인이 들어왔습니다. 그 새 주인은 제일 먼저 뭘 했을까요? 오래된 것, 더러운 것, 낡은 것들을 아낌없이 다 버렸어요. 가게 안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리노베이션을 했고, 가게를 새 물건으로 채웠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바뀌었는지 그 가게는 화장실도 광이 납니다. 게다가 이제는 직원들에게도 너무너무 잘해 줍니다. 자, 그 가게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장사가 아주 잘 됐죠. 2호점 3호점을 내고요.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나고요. 손님도 일하는 직원도 웃으면서 운영되는 그런 즐거운 사업장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바뀌니까 그렇게 희망이 없고 절망스럽던 가게가 그렇게 변한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돈 잘버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겠죠. 똑같은 장소의 가게라도 주인이 누구냐 하는게 참 중요하다는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그 가게를 운영하느냐 하는 문제는 한계점을 뛰어 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거죠.

자,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우리 각자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 각자도 좋은 주인을 만나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이니까 여러분이 주인입니까. “나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이야.. 살고 죽는 모든 문제가 다 나 하기에 달려 있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불교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특별히 불교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한 것도 아니고 해서 불교에 대한 이야기는 잘 끄내지도 않습니다. 그건 그분들의 영역이겠죠. 그러나 우리가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불교의 업보라는 말은 참 많이 듣지 않습니까. 업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따르는 행동을 ‘업’ 이라고 한다고 해요. 그리고 그 행동에 따른 결과를 ‘보’ 라고 한다고 하죠. 이 ‘업’ 과 ‘보’, 업보에 따라서 모든 인생이 결정된다고 보는 거죠. 살고 죽는 문제, 잘 되고 못 되는 문제가 나의 업보, 그러니까 다 나한테 달려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것이 여러분의 업보에 달려있습니까?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갈 2:19

우리가 여러번 살펴본 바대로 갈라디아 교회를 흔들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만, 율법의 행위를 잘 이행해야 구원이라는 결과물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사람들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기독교인은 초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너희가 잘 몰라서 그렇다고 비난했어요. 할례와 율법의 준수가 있어야 하고, 온전한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되며, 뭔가를 해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에 대한 바울의 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갈 2:19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 우리 누구도 율법을 다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그 율법 스스로가 확인시켜준다는 말입니다. 다른 설명이 있어서, 다른 가르침이 있어서 “아, 율법으로는 안되는구나..” 하고 깨우쳐지는게 아니라, 그냥 율법 자체만 깊이있게 다른 각도로 확인해 봐도 “아니, 그걸 어떻게 다 하나. 아니, 그걸 누가 다 할 수 있나, 난 그거 다 못따라가겠는데..” 하는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아 “안되는 거구나..” 를 알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가 되는 것입니다.

“죽었나니” 의 원어는 “아페다논” 입니다. 이 말의 뜻은 “완벽히 단절 되었다” 입니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흔히 그런 말 쓰잖아요. “아, 그것 완전히 죽었어.. 완전히 끝났어” 하는 뜻이죠. 그렇다면 왜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습니까? 그토록 율법에 목을 매던 사람이 왜 율법과의 관계를 끝내게 되었습니까? 왜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살려고 죽은 겁니다. 불교의 이해와 달리, 유대인들의 이해와 달리, 행위가 나를 구원으로 견인해 갈 수 없음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재 해석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겁니다.

이제 바울은 그 이야기를 다음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의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 말씀을 조금 세세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뜻은 뭡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한다는 말은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비바람이 치는데 포도나무만 흔들리겠습니까? 눈보라가 치는데 포도나무 가지는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과의 연합은 십자가를 건너뛸 수 없습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를 죽이시고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그 순간 성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자신의 죄성, 욕망에 사로잡힌 자아, 율법에 포로된 자아,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아, 세상 것에 집착하는 자아, 교만함에 사로잡힌 자아, 나태하고 무기력한 자아,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아, 모든 죄된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죄에 사로잡힌 나의 자아가 나의 주인이었는데, 사탄에 종 노릇하는 나의 자아가 나의 주인이었는데, 도대체 희망이 없는 그 주인은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포도나무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가지된 우리에게 이처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겁니다.

옛 주인이 죽었습니다. 오랫동안 죄에 사로잡혀 있어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 옛 주인이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폐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죄성 가득한 나의 자아가 죽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죽었으면 그만이지 뭘 하라고 하겠습니까. 끝난겁니다.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율법주의자들이 붙잡고 있는 겁니다.

율법 앞에 죄인일 수 밖에 없는 나의 자아가 죽은 후에, 그렇다면 내 안에는 이제 누가 살게 되는 겁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나의 주인이 죄성 가득한 나의 자아에서 흠도 없고 티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희망이 없는 가게가 “주인 바뀌었음” 이라고 현수막을 내걸듯이, 나도 주인이 바뀌었다는 현수막을 내거는 겁니다. 그게 크리스챤인 겁니다.

주인이 바뀌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인이 바뀌었음을 인정하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더 이상 여러분의 주인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새 주인이 되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나를 망하게 하는 것, 나와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나의 악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고쳐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악한 옛 주인은 그 일을 못합니다. 새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새 주인이신 예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그 은혜가운데 우리를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새 주인을 모신 나의 일상의 삶은 어떨까요. 나의 육신의 삶은 어떨까요.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겁니까? 새로운 주인이 일으키는 변화속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삽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겁니까? 원어성경을 보면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렇게 써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에는 그리고가 빠져 있지요. 여기 써있는 말 “그리고” 는 등위접속사 입니다. 앞의 말과 뒤의  말이 같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즉 내 안에 그리스도꼐서 주인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 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라고 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새 주인으로 모신 나는 그 새 주인되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매일매일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매일 매일 사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나눌 기회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오늘 좀더 보고 싶은 내용은 자신의 핏값을  주시고 우리를 사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살 때는 가치를 생각합니다. 경제적 개념으로는 “기회비용”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000원을 주고 물건을 산다면 그 물건은 내게 1000원 이상의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만원을 주고 산다면 만원 이상의 가치, 1억을 주고 산다면 1억 이상의 가치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사셨어요. 이게 참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는 죄성 가득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교환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교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시기 위해 자신을 지불하셨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우리를 위하여 핏값을 지불하십니까? 이  기이한 이야기를 로마서 5장 6-8 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롬 5:6-8

이처럼 기도 안 막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을 마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확증해내는 일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지만 온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의 죽음은 여름날 마실 가듯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아,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인데, 죽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38-39

인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심은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과 다름 없는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잔 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또한 요한복음 3장 16 -18절의 말씀,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6-18

이 놀라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의 잔을 피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은혜다! 이것은 참으로 은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은 참으로 은혜다!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값 없이 받았으니 참으로 은혜다!

공감 하십니까 여러분, 예수의 주인되심이 이제 은혜로 다가오십니까. 그러한 공감이 여러분의 영속에 충만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예수님 십자가 지심의 가치를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내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깊이 깊이 인식하며 나의 온 영이 느끼고 감사하며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도 옆에서 누군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의 가치를 폄하한다면, 비웃는다면, “에이, 그거 별거 아니고..” 라고 말한다면, “에이, 그래도 그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라고 말한다면, 그 말에 편안히 동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담대히 반박하며 나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안된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 앞에, 예수만으로는 어림없다는 사람들 앞에, 예수의 십자가 지심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들 앞에,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그들 앞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2천년전 사도바울의 이 고백이 오늘 좋은친구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