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 누가복음 5장 36-39절]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눅 5:36-39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 비유로 주신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두 가지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새 옷 조각과 낡은 옷에 대한 비유입니다.
[본문 36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눅 5:36
낡은 옷에 구멍이 나서 그 옷을 수선하려고 할 때, 그 구멍 난 것을 메우기 위해 새 옷을 찢어 얻는 천 조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새 옷도 못 쓰게 되고, 그 새 옷의 천 조각이 낡은 옷에도 어울리지 않아서 낡은 옷도 입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 나오는 마태복음 9장과 마가복음 2장에는, 새 옷의 천 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서 낡은 옷이 더 못 쓰게 된다는 내용으로 나옵니다. 당시에 옷을 만드는 쓰는 옷감의 재질은 주로 베로 된 것이었습니다.
베는 물에 빨았다가 말리면 수축 정도가 강합니다. 이때 새것이 낡은 것보다 수축이 더 많이 되기 때문에, 새 옷의 천 조각이 이어 붙인 낡은 옷을 당기게 되고 결국 낡은 옷이 더 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천 조각이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거나, 새 천 조각이 낡은 옷을 더 못 쓰게 만드는 것이거나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 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에 대한 비유입니다.
[본문 37-38]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눅 5:37-38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는 왜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게 될까요? 포도주는 발효가 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새로 담은 포도주는 발효가 더 많이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를 담은 부대는 발효가스의 압력으로 팽팽하게 부풀게 될 텐데, 만일 부대가 낡아서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면 그만 부대가 터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 담은 포도주는 신축성이 좋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비유로 가르치려고 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두 번째의 포도주 비유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해,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 곧 진리의 말씀입니다. 반면에 낡은 가죽 부대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발효하는 새 포도주와 같이 생명력이 있고 역동성이 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아서 예수님의 생명력이 있는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런 모습을 이 비유의 앞에 나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 첫 번째 배경이 이 본문의 앞 부분, 누가복음 5장 27-32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27-32]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5:27-32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레위라 하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인 세리 마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고 그를 부르시자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레위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며 제자들을 비방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를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비방했을까요?
여기에서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그들의 전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깨끗하게 하는 정결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덧붙여 전통과 관습을 만들어 낸 데 있습니다. 율법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율법 교사들이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규칙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율법보다 10배나 많은 규칙들을 만들어 냈고, 그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 유대인들의 미드라쉬와 탈무드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전통과 관습들로 인해 율법이 변질되고 남용됩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5:1-9]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마 15:1-9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전통을 근거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결의식을 어겼다고 바난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예로써, 그들의 고르반 전통을 언급하십니다. 고르반은 원래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을 일컫는 것인데, 하나님께 바친 예물은 건드릴 수 없다는 말씀을 근거로, 장로들은 부모 공양에 사용해야 할 제물도 하나님께 바치면 헌금이 우선하기 때문에 부모 공양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부모 공양에 사용할 재물이 있어도, 부모님께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 공양을 면제받습니다. 그리고는 부모가 죽고 나면 그 재물을 팔아서 일부를 헌금으로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사용하는 것으로 악용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장로들이 율법에 더해 만든 전통을 가지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어긴 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절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그리고 6절에서는 심지어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강하게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종교행위는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기면서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계명을 더하여 가르치다가 그만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 꼴이 돼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장로들의 전통은 정결의식에도 적용되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들과 식사를 하면 안 되는 것인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 마태의 집에서 죄인들과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비방하고 나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전통이 바로 낡은 가죽 부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새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깨끗하기 위해 세리 및 죄인을 멀리했지만, 예수님은 바로 세리와 죄인은 물론이요, 유대인들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깨끗하기를 원한다면, 부정하다 여기는 것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거룩하지 못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죄를 씻어야 정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죄를 씻어주시는 존재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근본적으로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정결하고자 했으니, 새 포도주와 같은 예수님을 가르침을 그들 마음에 담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는 물로 새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포도주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소개되는 가나 혼인 잔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6-9]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 2:6-9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사용하셨던 물이 바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 정결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앞에서 읽은 마태복음 15장에서 보듯이 식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도록 했습니다. 일종의 정결 예식입니다. 그래서 늘 집 안에 손 씻을 물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였는데, 예수님이 그 항아리의 물, 즉 그들이 자신들을 깨끗하게 해준다고 여기는 물을 이용하여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그 물이 자신들을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고 여기고 열심히 손을 씻었지만, 예수님은 그 물로 새 포도주를 만들어 그들에게 먹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는 그들이 지금까지 맛본 그 어떤 포도주보다 맛있는 포도주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우리를 궁극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분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인생의 참 맛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본문의 비유 말씀을 하시는 두 번째 배경은 누가복은 5장 33-35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5:33-35]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눅 5:33-35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트집 잡아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본래 금식은 구약에서 일 년에 한 번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속죄일입니다. 그러다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일 년에 네 번을 금식하기도 하였고, 예수님 당시에는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금식 역시 장로들의 전통과 같이 변질이 되고 맙니다. 그것을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 6장 16-18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6:16-18]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16-18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기색을 띠고 얼굴도 흉하게 합니다. 금식은 본래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며 마음속 깊은 슬픔을 표시하는 행위였는데, 유대인들의 전통은 자신의 경건과 헌신을 드러내고 자신 신앙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외식적인 금식이 곧 낡은 가죽 부대임을 가르치면서, 그런 마음으로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의 죽음에 직면하여서는 진심으로 슬퍼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낡은 가죽 부대로는 왜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을까요?
누가복음에는 같은 내용이 나오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는 구절이 한 절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마지막 39절 말씀입니다.
[본문 39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 5:39
왜 묵은 것이 좋다 할까요?
본문에서 마지막에 붙여진 이 말씀은 사실 좀 생뚱맞은 데가 있습니다. 지금껏 새 포도주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묵은 것이 좋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사실 포도주는 묵은 것이 맛이 더 좋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묵은 포도주가 맛이 더 좋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묵은 것을 더 좋아하듯이 새 포도주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낡은 가죽 부대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리새인들은 낡은 전통의 맛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맛은 그 전통과 관습을 이용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타인을 정죄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은 종교적, 윤리적 우월감에 젖을 수 있는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 맛은 고르반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맛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맛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전통과 관습 자체가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탈무드에 얼마나 좋은 말들이 많이 있습니까? 심지어 그들이 만들어 낸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부패하고 변질되기 시작하면 세상의 맛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진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 비추어, 혹시 우리 자신에게는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가치관이나 습관이나 신념이나 신앙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복음의 진정성과 생명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 마음과 생각이 낡은 가죽 부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