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2장 16절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이제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어서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한국 음식중에 김치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여기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주 익숙하지만 참 견디기 어려운 냄새가 나더라고요. 왠 젊은 미국 여자분이 말끔하게 멋을 내고 비행기를 탔는데 김치를 통째로 들고 샐러드 먹듯이 먹고 있는 겁니다. 와, 그 냄새도 그 상황도 참 강렬했습니다. 그거 그렇게 먹는게 아니고 반찬이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김치를 잘 모르니까 그렇게 먹고  있었겠죠. 한국사람이 아무리 김치를 좋아한다고 해도 누가 그렇게 김치를 통째로 샐러드 먹듯이 먹겠습니까. 그것도 비행기 안에서. 맛도 있고 건강에도 좋지만, 잘 모르니까 그렇게 먹는 거지요.

성경속에는 우리를 살리고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우는 말씀,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아주 맛있고 아주 유익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씀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또 어떤 말씀들은 오해하기가 쉬어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갈라이다서 2장 16절의 말씀은 얼핏 보기에 아주 쉬운 말 같은데,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목숨을 걸고  다투어 온 내용 중 하나입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이 말씀은 제일 처음 누구와 누구의 갈등에서 나온 말일까요?

복음이 처음 전해지던 시대에 유대인 크리스천 중에 일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율법의 준수가 더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여러번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지요. “그냥 믿는다고 어떻게 천국에 가? 잘해야지 천국에 가지. 율법도 지켜야 천국에 가지.” 이랬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율법이 완성되었기에 오직 예수님이면 된다고 하는데, 거기에다 뭘 자꾸 더하려고 하니까,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사도들과 율법주의자들 간에 갈등이 생긴 겁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율법을 더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아니다,  당신들 뭘 좀 잘못 아는 거야.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봐. 본인 스스로를 좀 돌아봐. 그 율법 누가 다 지킬 수 있다고 하는가. 누가 그걸 가지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가. 율법에 비추어서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사람이 있나.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이게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다툼이었어요. 그러면 이제 그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잘 구비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헷갈릴 수도 있었겠다 싶죠.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내용에 대한 오해는 그 뒤로 끝이 났을까요? 초기 기독교를 넘어서서, 율법주의자들이 세력을 잃은 후에는 구원에 대한 이 구절은 모두에게 온전히 이해되었을까요? 남들은 그만두고, 여러분들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 흔히들 ‘이신칭의’ 라 부르는 이 구절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안타깝게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이 구절은 바르게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까지,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성경구절을 오해하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잘못된 복음, 가짜 복음을 구원의 길로 확신하게 되는 거지요.

자, 그렇다면 어떤 오해가 있을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을 대항하여 쓴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갈 2:16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다음 중 누가 천국을 갈까요?

  1. 평생 강도질을 하고 산 사람
  2. 평생 도둑질을 하고 산 사람
  3. 평생 남들을 속이고 산 사람
  4. 평생 착하게 남들을 도운 사람

우리가 아는 천국은 누가 갈까요? 정답은 뭡니까?

여러분들이 만약 초신자라면 쉽게 답을 선택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당연히 4번 ‘평생 착하게 남들을 도운 사람’ 이죠.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미 초신자가 아니라면 제가 드린 문제는 잘못된 문제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보기들이 틀린 거죠. 답이 없어요. 답을 찾을만한 근거가 보기 안에 없습니다.

“그래도 강도가 천국을 가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래도 착한 사람이 가는 게 맞지 않나요? 그래도 착한 사람이 의인이 아닐까요? 그래도 천국은 의인이 가야하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천국은 의인이 가는 거지요. 그러나 누가 의인인가의 문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평생 착한 일을 한사람이 무조건 의인입니까? 그것은 그냥 세상의 기준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39-43

예수님과 함께 두 명의 행악자들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심한 죄를 졌으면 그 당시 가장 심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했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악인중에 악인이었던 것이죠.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은 예수님을 막 비방해요. “아니, 힘 있으면 좀 살려봐. 메시아라면서 자기도 못살려.. 아니, 남들은 그만두고 본인이라도 살려봐. 그 옆에 있는 우리라도 살려봐. 못하는 거지, 그렇지?” 그러자 다른 한 사형수가 그를 꾸짖죠. 그리고는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죄없이 죽으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확신한 거죠. 끝으로 예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자신의 미래를 맡기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회개하고 예수를 알고 예수의 나라를 소망한 이 사형수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자, 이 사람,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난 이 사형수는 악인으로 죽었을까요, 의인으로 죽었을까요? 예수님을 붙잡은 이 사형수는 육신의 죽음 후에 천국으로 갔을까요, 지옥 불에 떨어졌을까요? 이처럼 우리가 구원을 놓고 생각할 때 쉽게 할 수 있는 첫번째 오해는 무엇입니까. “누가 의인인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진정한 의인인가” 의 문제입니다.

두번째 오해는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의인이 될수 있나” 의 문제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시편에 나온 말을 바울이 다시 되뇌인 말 아닙니까. 신약도 구약도 명확하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어떻게 의인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그 사형수를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는 건가요? 

오랜시간 동안 카톨릭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을 “만들어짐”으로 이해했습니다.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의롭게 된 성도가 평생을 살면서 만들어진 의로움이 기본이되어 선을 행하게 되고, 그의 의와 선행을 종합하여서 최종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까지야 주님의 개입이 필요하겠지만, 그 후로는 매우 능동적인 선택으로 선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이야기이고, 그 결과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예요.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삶 속으로 끌고 와 보십시요.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 보십시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의인으로서의 삶을 무리없이 살게됩니까? 예수믿기 전에는 착한 일 하는게 참 어려웠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착한 일 하는게 너무 쉽습니까? 그냥 저절로 술술 하게 됩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미움만 가득하고 불만만 가득했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순식간에 사람이 바뀌어서 사랑만 가득가득 합니까? 예수의 사랑이 새록새록 묻어납니까? 우리의 일상 속에 죄가 없습니까?

아니잖아요. 여전히 죄가 나를 따라다니쟎아요. 의인이 되었다는데, 의인이 되어서 선을 행한다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의인이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랑이 내 안에 넘치지 않잖아요. 그럼 나는 뭡니까? 나는 의인이 아닌 겁니까? 나에겐 믿음이 없는 겁니까? 

나에게는 구원이 없는 겁니까?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라는 사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서 목사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랜시간동안 정말로 열심히 말씀을 보고 묵상하며 고민하며 좌절하며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켜 나간 사람입니다. 그의 자서전과 같은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라는 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오랜시간 의인과는 너무나도 먼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며 좌절했는지 몰라요. 처절하게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어요.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신은 죄인인 거예요. 남들이 보기엔 이미 경건한 사람이고 훌륭한 성도라고 박수를 받는데도, 스스로를 볼때 영 아닌 겁니다. “아니, 의인이라는데 난 왜 이런 거야.. 아니, 의롭게 되었다는데 나는 왜 이런 거야..”

여러분은 그런 고민 하신 적 없으십니까. 우리는 이 고민의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존 번연은 그 답을 어디서 찾았습니까.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나와 있는 이 말씀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

의롭다함

이 단어들의 원어를 보면 모두 수동태입니다. 이 구절들이 수동태로 쓰여짐으로서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가 우리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뭘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특별히 노력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는 것입니다. 열심히 해서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받는것 입니다. 자격도 없고 선하지도 않고 죽어야 마땅한데, 그냥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로움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으로 “인간이 의인으로 만들어짐” 이라는 말이 맞겠습니까 아니면 “믿는 자를 의롭게 여겨주신다” 는 말이 맞겠습니까? 그렇죠.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 의 뜻은 믿는 자를 의롭게 여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루아침에 악한 사람이었는데 의인이 되어서 착한 사람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뼈속까지 의인이 아니더라도, 아직 의인다운 선한 삶을 살 수는 없어도, 심지어는 선한 것 하나 없어도 주께서 나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말보다는 믿음으로 의롭게 만들어짐이라는 해석을 믿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냐 하면요, 예수 믿고난 후에 죄를 짓게 되면 나를 믿게 만드신 성령님을 훼방하는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 일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막 3:29) 의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존 번연이 고백한 자신의 경험이지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 하면요, 우리가 죄 앞에서 실족해서 주님과 단절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예수꼐서 십자가에 달려가시며 허문 담을 우리손으로 다시 쌓아 올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가 죄로 인해 주님과 단절되었다는 이해는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다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겠다는 말씀은 우리가 비록 의롭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의롭게 보아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는 비록 죄인이나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으로 오셔서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 되어서

예수님의 의로 우리를 덮어 싸서

우리의 죄는 더 이상 보시지도 기억하시지도 않으시고 예수님의 의, 그것으로 우리를 보아 주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인 것입니다.

끝으로, 세번째 오해는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짐이라는 말, 이신칭의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내가 뭘 하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의지적으로 믿음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짐이라는 말 속에서,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속에 믿음으로 쓰인 단어 “피스티스” 는 믿음이라는 뜻과 동시에 신뢰, 신실함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라고 하면 내가 뭔가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라고 하면 벌써 내가 뭘 한다는 느낌이 좀 내려가지요.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라고 하면 나의 역활은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내어서 의롭게 여김을 받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함,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심,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내가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죠. 그 내용들은 로마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무엇을 느끼십니까. 갈라디아서 2장 16절. 우리의 구원에 대한 성경말씀을 살펴 보았는데요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이 말씀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까. 나의  구원에 나의 공로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겁니다. 난 그냥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악하디 악한 죄인인데, 살아날 희망이 0.0001%도 없는데, 그냥 놔두면 완전히 죽어 문드러질 나 인데, 그냥 놔두면 영원한 지옥 불로 떨어질 나 인데, 성령님이 오셔서 믿음을 쥐어주시고 그저 두려움에 덜덜 떨며 믿음 하나 들고 서 있는 나를,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 예수님의 의로 덮어 주시고 예수님의 의로 덮임 받은 나를 의롭게 여겨주시겠다는 약속. 그 약속이 이 말씀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다 살아난 자의 마음에 어떻게 감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거저 받은 자가 어떻게 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주신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여 감사와 기쁨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