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 2:11-14

예전 어르신들은 왜 그렇게 담배 심부름을 자주 시키셨는지 몰라요. “얘, 가서 담배 한갑 사와라.” 요즘 아이들은 그런 경험이 없겠죠.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필 담배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남은 잔돈으로 과자 한 봉지 사먹을 수도 없었는데, 저는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뛰어가서 담배를 사다 드리곤 했어요. 왠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끼며, 아버지의 미소를 생각하며 말이죠.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를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만약에 지금 저희 아버님이 살아계셔서 저한테 담배 심부름을 시키신다면, 제가 신나게 콧노래를 불러가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담배를 사다 드릴까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왜 안 그럴까요? 제가 목사여서?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마음이 바뀌어서?

아니죠.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걸 알게 됬으니까. 그게 틀린 줄 알았으니까. “아버지, 조금만 참아보세요. 그거 몸에 해로워요. 담배피시다 혈관 막히면 큰일나요.” 아버지를 진짜로 사랑하니까 이렇게 했겠죠.

이와 비슷한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어린 자녀를 사랑한다면 아이를 달랜 답시고 어린 아이손에 핸드폰 게임을 들려주지는 않습니다. 남편을 사랑한다면 방탕한 남편의 어긋나감을 호호호 웃으면서 받아주지는 않습니다. 친구를 사랑한다면 친구의 일탈과 범죄행위를 눈 질끔 감고 못본척하지 않습니다. 제자를 사랑한다면 공부에 영 관심이 없는 학생에게 “그래 네 인생이니 네가 살거라, 네 맘대로 해라..”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장면을 봅니다. 아니 베드로가 바울하고 동갑내기였을까요? 잘 모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정확한 나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더 연장자였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어요. 베드로는 사도들의 뿌리와 같은 인물이었지요. 말하자면 바울한테는 한참 선배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연장자고 선배고 상관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저 친구처럼 지냈을까요? 미국사람들처럼 위 아래 없이 편하게 지내나요? 아니지요. 한국사람처럼 유대인도 연장자, 장자 이런 것 많이 따집니다. 나이도 나이지만, 사도직 자체도 도전을 받는 바울, “바울 너 사도 아니잖아” 하는 평가 때문에 항상 스스로 “사도된 나 바울”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지금 자타가 공인하는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겁니다.

그 순간 바울은 아무 꺼리낌이 없었을까요? 편안한 마음으로 베드로를 책망했을까요? 아니죠. 바울 자신도 섬뜩하고 아주 불편한 그런 순간이었겠죠. 그런데도 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습니까? 왜죠?

사랑하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섬뜩 하지만, 잘못된 길을 가도록 놔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 그럼 베드로는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요?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2:11-13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유대인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그들이 로마인 사회에 쉽게 섞여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빈곤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방인이 중심이 된 안디옥 교회는 형편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연보를 모은 겁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나눔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우리가 지난번에 나눈 바대로 바울의 신앙과 베드로를 포함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자들의 신앙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였고,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 친교의 악수는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그래도 참고 잘 지내보자..” 하는 악수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방금 읽으신 본문은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아, 우리의 믿음이 같은 것이구나..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래, 구원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이런 근본적인 믿음의 이해에 대한 동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안디옥으로부터 온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은 식사를 같이할 수 없거든요. 심지어 물 한모금을 청하는 예수님께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 나한테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유대인 아니세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율법은 중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것이다” 라고 서로 악수를 한 베드로가 율법을 안 지킨다고 욕 먹을까봐 무서워서 밥 먹다말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앞 뒤가 안 맞는 행동인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조금 조심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갈라디아서 2:12

얼핏 보기에 이 구절은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 전부가 할례자들 또는 율법주의자인 것처럼 보여서, 마치 야고보가 율법주의자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도 영어성경도 모두 그렇게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이 할례자들과 야고보는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야고보가 사람들을 보냈는데, 어쩌다보니 그들 중에는 할례주의자들도 있었다.. 는 이해가 맞는 이해 입니다.

하여간 베드로가 밥 먹다 말고 자리를 피하니까 덩달아서 옆에 있던 바나바도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같이 담소를 나누며 식탁교제를 나누던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무안하고 황당합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까. 그래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라디아서 2:14

자기는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며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방인들과 밥도 먹고 율법과 관습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 갑자기 율법주의자들의 눈치를 보고 욕 먹을것이 두려워서 밥 먹다 말고 도망을 가버리면, 이방인들은 얼마나 헷갈립니까. “아, 그래도 율법은 지켜야 되는 거였나 보구나.. 아, 그래도 할례는 받아야 되나 보구나.. 아, 예수를 믿어도 우린 아직 더러운 존재인가 보다..” 복음의 본질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점에 대해서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죠. 아주 불편하고 난감한 상황앞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했나요?

“베드로가 매우 불쾌해 했더라” 라든지, “베드로가 바울과 심하게 다투었더라” 라든지, “베드로가 화를 내고 떠나갔더라” 하는 내용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베드로가 까마득한 후배인 바울의 공개적인 책망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몇가지 중요한 내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첫쨰로,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할 만한 위치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사도이다 아니다 시비에 시달려야 했던 바울이 사도중에서도 수석 사도인 베드로를 책망할 만한 사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책망은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하여야 할 책임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맹목적으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를 버리고 나를 살리신 예수를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것을 믿으며, 나를 사랑하는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율법 앞에서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나는 일은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베드로가 바울의 책망을 묵묵히 받아들임으로써 바울의 주장, 즉 이신칭의의 진리를 묵묵히 지원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가 그토록 사랑하고 그토록 따라다니던 예수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5:7-9

외식한다는 말은 무대에서 연기자들이 연기한다는 뜻입니다. 가짜라는 말이지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당대에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으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척 해도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 척 해도 가짜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수석 사도인 베드로가 바울한테 지금 그 말을 들은 것이죠. “이거 외식인데. 이거 가짠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던진 그 단어를 지금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봉에 서 있던 베드로가 들었을 때, 어떻게 깨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차,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어떻게 그 말 앞에 토를 달며 싸울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외식의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지금 보시는 대로 수석 사도인 베드로조차 쉽게 넘어서지 못했던 문제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식. 가짜. 겉과 속이 다름. 행동을 이끌지 못하는 가짜 믿음. 우리는 이 단어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잘 하다가도 까딱하면 넘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 외식이라는 단어를 놓고 좀더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먼저 바리세인들고 서기관들이 보여준 외식은 어떤 외식입니까? 성경 지식도 많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듯 행하고 하나님을 아주 철저하게 따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은 왜 가짜, 즉 외식하는 자가 되었습니까?

마음이 없어서 입니다.

교회에 나갑니다. 십일조도 합니다. 새벽 예배도 열심히 나갑니다. 구제 활동도 열심히 합니다. 성경도 열심히 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 만약 전혀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이 전혀 그립지가 않고 예수님께 전혀 미안하지도 않고 전혀 보고싶지도 않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외식하는 자 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했던 외식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책망하신 외식입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은 외식. 이것은 어떤 외식입니까?

선행을 합니다. 남들을 돕습니다. 소리내 기도합니다. 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눈물로 찬양합니다. 그러나 늘 생각하고 갈망하는 것은 주님의 시선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들의 시선, 오직 사람들의 박수소리, 오직 사람들의 칭찬을 갈망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입니다. 속은 썩어있고 겉보기에만 멀쩡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외식입니다.

그리고 방금 우리가 본 베드로의 외식은 어떤 외식입니까?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믿음. 부당함 앞에 담대히 맞서지 못하는 믿음. 아는대로 배운대로 행할 수 없는 믿음. 진리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믿음. 위기앞에서 씩씩하게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는 믿음. 행동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믿음. 이것은 죽은 믿음, 즉 가짜입니다. 외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외식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나누다 보면, 도대체 누가 여기서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말씀을 알면 알수록 성경을 이해하면 할수록 베드로도 넘어졌던 그 일, 외식함이 내 안에도 있음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교회에 가 보세요. 전부 다 나이스 합니다. 완전 친절모드 입니다. 나쁜사람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음날 세상에 나가서 할 짓 안할 짓 다해가며 삽니다. 나는 그런 적 없습니까. 외식 아닙니까? 악을 보고도 못본척 하고 불의와 타협을 하고 나쁜 일이라도 돈만되면 물불 안가리고 진행합니다. 외식 아닙니까?

세상에 교회가 이렇게 많고 세상에 종교인 중에 크리스천이 가장 많다는데 세상은 왜 점점 악해만 집니까. 교인들이 목사들이 외식하니까 그런것 아닙니까. 겉과 속이 다르니까. 가짜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인의 외식의 문제는 기독교 존폐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다 가짜라면. 기독교가 욕을 먹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도 바로 이 외식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외식의 문제 앞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외식의 문제는 어떻게 극복되어질 수 있을까요.

식은 땀을 흘려가며 정말 어렵게 수석사도를 책망하였던 사도바울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 “아버지, 담배 피우시면 큰일나요. 그러시면 안되요.” 말할 수 있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사랑. “여보, 그렇게 방탕하게 살아서 되겠어요, 그러면 안되잖아요.” 남편을 향하여 직언을 날리는 아내의 사랑. “얘들아, 그래도 너희가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젊은 사람들이 이래서야 되겠니?” 학생들을 자녀처럼 돌보려는 선생님의 사랑.

그런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랑이 모여서 우리들의 외식함을 멈춰 세우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사랑의 책망이 베드로의 외식함을 멈춰 세운 것과 같이, 온전한 성도가 하는 사랑의 책망은 교회를 살리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를 보시며 주님의 선한 뜻을 이해하시는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 넘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