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 빌립보서 2장 5-8절 ]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
이라
현대인의 크리스마스(성탄절)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파티를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하며 함께 즐깁니다. 하지만, 그 안에 정작 생일 당사자인 예수님이 없는 파티와 모임을 가지며 타인과 즐거움을 함께 나눕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음에도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즐거움을 나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고독감을 느낍니다. 수많은 만남과 모임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속마음을 터놓지는 못합니다. 그 까닭은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만 정성을 다해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정작 속 깊은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고독과 외로움 속에 삶을 살아 갑니다. 이와 같은 군중 속의 외로움과 고독을 미국의 사회학자 리스먼은 그의 책 <고독한 군중>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대중사회 속에서 타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고립감으로 번민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연극에서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할 때, 관중 속에 홀로 있는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때문에 사람은 진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공감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에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남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처지와 생각을 그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느낌과 감정을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나의 이야기를 정성껏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고독감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어지고, 고독은 더욱 깊어갑니다.
사람의 공감 능력
그런데 사람의 공감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나 이웃,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해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가 공감해줄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공감해줄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인 지적, 정서적, 경험적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또한 사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필요한 집중력과 인내력에도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고독은 점점 깊어만 갑니다.
예수님의 공감 능력
예수님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어 놀라운 집중력과 인내력으로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며, 우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모두 공감해주시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1) 예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쓰다가 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물건을 만든 사람만큼, 그 물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본체이신, 즉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를 직접 지으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1-3]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3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드신 분이시기에, 그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인 것입니다.
2)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마음을 완전하게 공감하실 수 있는 두 번째 까닭은,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우리의 입장이 돼 주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본문 7-8절]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7-8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임에도, 사람의 형체를 가지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이는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공감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사고방식과 기질과 정서를 철저히 비워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하고,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을 느껴보려 하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자신의 온전히 비우고 우리와 같은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태아로 오셔서 오롯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시고, 죽음까지도 경험하심으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대면하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자신이 완전하게 공감을 받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성탄절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탄절은, 군중 속의 고독한 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위해 나를 만나시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나의 마음을 공감하시는 존재가 바로 이 땅에 오신 그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경청하고 공감해주신 사람들
우리는 성경에서, 고독하고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아픔에 공감해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
[요한복음 4:3-7]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3-7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 여인은 자신의 아픈 과거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마치 도망을 다니듯 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올 때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햇볕이 뜨거운 시간을 일부러 골라서 나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여인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까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비난을 자초할 뿐이었고, 자신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이 광경은 그 여인에게 매우 낯선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심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뒤에서 수군거릴 뿐 자신을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가, 물을 좀 달라고 하는 누군가의 그 말이 내심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수치심에 감춰두었던 자신의 과거까지도 털어놓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여인이 수치심 속에서도 실낱같이 붙들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졌으며, 그 여인으로 하여금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슬픔 속에서 외롭게 사는 한 여인을 먼저 찾아가주셨고, 그 여인에게 새롭고 놀라운 삶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2)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신 예수님
[마가복음 10:46-50]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마 10:46-50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바디매오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사는 고독한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동전 몇 닢을 던져주긴 했겠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거나, 그의 마음을 공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역시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외침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조용히 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불러주시고, 그의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3) 베드로의 속마음을 알아주신 예수님
베드로는 자신의 삶에서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고 그로인한 슬픔과 고독 속에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실수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보는 현장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돌아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예수님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말을 거시고,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상처를 씻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15-17]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17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요? 그리고 그 잘못을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으며, 돌이킬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돌이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 알아주시길 얼마나 간절히 바랬을까요? 그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바로 그 말을 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던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질문은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하여 확인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었느냐며 따지는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야 네가 나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다 안다.”, “그럼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니까 이제 그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마음 편히 너의 할 일을 하거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베드로의 마음을 읽어주셨고, 온전히 그의 마음을 공감해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그가 하고 싶었던 말, “저는 지금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하심으로, 마음 한 구석에 돌덩이처럼 박혀 있었던 마음의 짐을 덜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그의 인생길을, 그가 힘 있게 걸어 나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예수님
우리를 지으신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시고, 고독한 사람들,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어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아픔과 비밀을 간직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이 가슴 속 깊이 묵혀 두었던 말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고, 그 말을 들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공감해 주셨고,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의 짐을 벗고 새롭고 놀라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날을 기념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하는 비밀스런 사연들, 아픔들, 수치스런 과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들도 마음속에 고독과 외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연은 다를 지라도, 걸어온 길은 다를지라도, 우리들 안에 사마리아 여인, 바디메오, 베드로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정성껏 들어주시고, 공감하시며,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는 올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는 성탄절이 되기를
나아가 오늘 말씀처럼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결심하는 올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성탄절을 맞이하여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기쁨을 누리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들이 만나는 사마리아 여인, 바이매오,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그들을 새롭고 놀라운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