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예레미야 20장 7-9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7-9

행복하고 재미있고 신나게 사는 것은 누구라도 원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소망입니다. 누가 우울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고 싶습니까. 아무리 신실한 성도라 하더라도 오늘 이순간 조금 더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쁘게 지내고 싶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소망이 아닐까요. 그러나 삶은 그 소망처럼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성도의 즐거움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라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넘어서기 힘든 고통과 좌절이 삶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처해진 상황의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의 평안도 구원의 기쁨도 누리기 힘든 경우가 얼마든지 우리들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당신은 믿음이 없어” 라고 질책하기엔 너무나도 참담하고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앞에 성도들이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예레미야란 인물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는 삶을 살았으나, 그러나 예레미야는 어렵고 힘들고 좌절스러운 시간들을 고통스럽게 눈물지으며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막막한 상황속에서 주저앉아 울 수 밖에 없었던 예레미야라는 인물을 바라보면서, 저는 오늘 예레미야의 눈물과 성도의 탄식은 어떻게 닮았는가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예레미야 20장 7-8절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내용이 유다의 멸망과 유다의 파멸이니까, 유다의 잘못을 드러내고 유다를 질책하니까,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가만히 두지를 않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목사님을 만났는데, 목사님께 이런 저런 개인 사정을 말씀드리는데, 목사님이 “다 잘될 겁니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네요. 하나님은 다 이해하실 겁니다.” 하시면, 서로 훈훈하지 않습니까. 이래야 서로 감사하고 흐뭇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목사님이 여러분의 사연을 듣고 “거 봐라, 네가 마귀의 자식 맞지 않냐.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넌 이제 망할거다. 네 자식들도 싹다 망할거다. 병걸리고 죽고 고생하고 매질 당할거다. 망신에 망신을 더할거다. 하나님 진노의 심판이 너에게 너의 가족에게 떨어질 것이다. 대대 손손 고생할 것이다. 다 네 잘못이다.”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이, 가족까지는 건들지 말아야지..’. 자, 이 정도 되면 사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만약 이러시고 다니시면 그 목사님 목회 못하십니다. 참아줄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그것이 질책하는 목사님만의 잘못입니까? 아니죠. 문제는 시대의 악함이죠. 그 시절 유다의 악함이나 오늘날 이 시대의 악함이나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더하면 더했지요. 귀에 단소리, 위로의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 희망의 이야기나 듣고싶지 누가 야단맞고 싶습니까. 누가 심판에 관심을 둡니까. 누가 마지막 날에 대해 심각하게 집중합니까. 그러니까 예레미야의 처지가 심각해지는 거예요. 이 악한 세상앞에서 이제 예레미야가 탄식합니다. 예레미야 12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렘 12:1

놀랍지 않습니까? 이 질문, 너무나도 귀에 익숙한 질문 아닌가요? 저도 수십번도 넘게 해 보기도 하고, 받아보기도 한 질문 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어떻게 저 악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잘살아! 하나님 의로우시다면서요. 근데 저 악독한 사람들 평안히 잘만 사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질문은 놀랍게도 수천년 전부터 있어 왔던 질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느시대 사람인가요.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로 이어지는 유다의 마지막 시대를 산 선지자이지요.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년 전 사람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이었던 예레미야는 (렘1: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인 동시에 제사장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에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예레미야의 믿음은 얼마나 견고하고 선명했을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질문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 악인들 왜 이렇게 잘 살아요.” 이건 부러워서 하는 말이 아니예요. 그냥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 저렇게 악하고 저렇게 못났는데, 왜 난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왜 저들은 저렇게 평안히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이유를 말해주세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 상황을요.” 악인의 형통함과 하나님을 배신한 자의 평안함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악한 백성들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이 악인들 심판하셔야 되는 거잖아요. 도대체 언제까지 악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까.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무서워하지도 않아요.” 예레미야의 불만과 탄식이 터져 넘칩니다. 그의 불만과 탄식은 우리의 불만과 우리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자, 이쯤 되면 하나님의 답이 궁금하죠. 예레미야 12장 5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렘 12:5

잘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렘 12:5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난해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는 악인의 형통함은 그러나 보행자의 경주처럼 가벼운 도전이라는 말씀입니다. 말과 경주하는 것에 비한다면요. 사람과 뛰는게 쉽겠습니까, 말하고 뛰는게 쉽겠습니까. 말하나 마나죠. 그러니 말과 경주하는 것 같은 더 큰 어려움과 더 큰 믿음의 도전이 곧 일어날텐데, 지금도 그렇게 흔들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냐는 겁니다. 아직 큰 난리는 일어나지도 않은 평안한 땅에 살면서도 그렇게 투덜거리면, 요단강이 넘치는 사망의 고통이 밀려올 때는 어떻게 견딜 수 있겠냐는 겁니다. 고작 백년도 누리지 못할 악인의 형통함과 반역자의 평안함 앞에 그렇게 연약하게 믿음이 흔들린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신뢰할 수 없다면, 더 큰 환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 승리의 자리로 나갈 수 있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 앞에 탄식하는 예레미야에게, 또 불신자들의 평안함을 보며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크게 보아라, 길게 보아라, 더욱 강건하여 지거라. 헛된 사람들의 평가에 귀 기울이지 말거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잠언 24장 19-20절

악인의 등불이 아무리 밝아보여도 기름이 다하는 날이면 꺼지기 마련이요, 악인의 등불이 아무리 밝아보여도 아침 해가 솟아 오르면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는 이제 탄식없이 하나님의 일을 담대히 해 나갔을까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예레미야가 감당해야 할 고통의 크기가 너무도 거대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렘 15:10

우리가 정말 힘들 때 이런 말 하지 않습니까. “아, 왜 태어나서 이 고생이냐. 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하냐.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다들 나한테 왜 이래.” 반항심 강한 아이들은 한술 더 뜨죠. “왜 낳았어, 왜? 엄마는 왜 날 낳았냐구?” 이렇게 아이들이 떼 쓰면 어머니들이 한마디 하시요. “미안하다. 나도 너 같은 애가 나올지 몰랐다..” 떼 쓰는 아이에게 오히려 약을 올립니다. 떼 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예레미야.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렘15:11

여기 “강하게 할 것이요” 라는 말은 조금 더 깊이 있게 해석하면, “해방시키리라” 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속에서 좌절하고 헤매는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야, 내가 널 그 고통속에서 꺼내줄거야. 해방시킬거야. 내가 너에게 복을 줄거야. 너를 저주하던 사람들이 네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게 할 거야.” 이렇게 위로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멈추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탄식도 멈추지를 않습니다. 탄식을 멈추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보면 ‘아니, 그렇게 힘들면 그만하지. 그렇게 힘들다고 탄식하며 울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좀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레미야는 멈출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의 일을 멈출수가 없었어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내용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머리로 하는 일이 아니어서, 개인의 이익을 바라보고 하는 일이 아니어서, 분명히 손을 떼는 게 이익이란 걸 잘 알지만, 멈출수가 없는 겁니다. 가슴에 뜨거운 소명의 불을 끌 수가 없는 겁니다. 믿음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예레미야가 탄식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5장 15-17절의 말씀은 그가 처한 곤란함을 좀더 선명하게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렘 15:15-17

“하나님, 하나님일 하다가 거의 죽게 생겼어요. 하나님, 하나님께서 너무 늦게 움직이셔서 전 거의 망할 것 같아요. 하나님, 하나님 때문에 제가 얼마나 봉변을 당하고 다니는 줄 아시나요. 아니, 하나님 사실 전 하나님의 말씀 참 좋아하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기쁨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아니잖아요. 제가 하나님 따라가다가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맨날 심판을 선포하라고 하시니까 제가 왕따가 됬잖아요. 아, 이렇게 어려운데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나님의 도움은 어디 있습니까.”

예레미야의 이 눈물이 우리의 눈물 아닙니까. 예레미야의 이 탄식이 우리의 탄식 아닙니까. 여러분, 성도가 성도답게 살려다 보면 외톨이 되기 쉽상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서 기도와 헌신으로 열심을 다하면요, 광신도, 꼴통이라고 손가락질 당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행위와 현실속에서 난처해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렘 15:19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어, 이게 진짜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일까. 내가 잘못 해석하는게 아닐까. 내게 돌아오라니요. 하나님의 일을 하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탄식하는 예레미야, 누가 봐도 분명히 어려운 상황속에 빠져있는 예레미야에게 “내게 돌아오면”, 그러니까 원어로 “슈브“, 즉 “회개하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다” 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어려움 앞에서 고통 속에서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던지시는 말씀은 “회개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다시 쓰리라” 입니다.

“어구어구, 힘들지. 어구어구, 어떡하니..” 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요, “너, 무슨 불만이 이렇게 많으냐? 너, 네가 받은 소명, 네가 받은 나의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왜 모르는 거냐. 너, 왜 나의 선함을, 나의 공의로움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냐. 돌아서라! 회개하라! 그리고 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끝났으면 솔직히 좀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말할 수 없는 사역의 고단함과 눈물로 탄식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은 계속되어 집니다.

굳게 서라
더욱 강하여 져라
내가 너를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악한 저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의 탄식이 멈추지 않은 것처럼 악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참된 성도의 눈물과 탄식이 멈출 수 있겠습니까. 좋은 말만 기대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르게 서면 설수록 더욱 더 많은 대적자들이 여러분을 치며 조롱하며 비방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약속을 기억 하시길 소망합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렘 15:20-21

외면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탄식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 힘에 의지해 예레미야가 살았던 것처럼, 그 힘을 의지해 선한 싸움에 담대히 나서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