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열왕기하 5장 13-15절

영어는 어느 나라 말입니까? 미국말이기도 하지만 원래 영국 말이지요. 일어는 일본 말이고, 독어는 독일 말이죠. 그렇다면 아람어는 어느 나라 말일까요? 그렇죠, 당연히 아람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람이라는 나라가 영국이나 미국처럼 그렇게 엄청나게 강력했던 나라였을까요. 그렇지는 않았다고 알려져 있죠. 하지만 아람어는 오늘날 영어가 전세계의 공용어인 것처럼 고대 중동의 공용어로 쓰였고, 예수님 오셨을 당시도 아람어에 많은 영향을 받은 히브리어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성경의 일부 그러니까 다니엘이나 에스라의 일부도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죠.

이처럼 대중화된 언어는 그저 언어만 퍼져 나가는게 아닙니다. 언어는 많은 문화, 많은 역사등을 끌어 안고 퍼져 나가죠. 그러기에 고대 중동사회에서 아람은 비록 바벨론이나 에굽정도로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이방인, 바로 이 이방인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진 나라였을 겁니다.

이런 대표적인 이방국가 아람에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은 이스라엘과 전쟁과 화평을 반복해가며 참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죠. 이스라엘의 대표적으로 악한 왕 아합왕도 이 아람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아람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속한 민족이기도 했습니다. 이삭의 아들이었던 야곱,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야곱의 아내들도 당연히 아람 사람이었죠. 야곱이 에서를 피해서 도망가 만난 외삼촌 라반이 아람사람이니까 야곱과 결혼한 라반의 딸들도 당연히 아람사람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아람은 이스라엘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그러나 아주 먼 관계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웃나라가 얽히고 설켜서 살아가다보면요, 차라리 먼 나라보다 더 미워요. 한국사람에게 먼 나라가 더 불편합니까, 가까운 나라가 더 불편합니까. 말하나 마나죠. 게다가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람은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왕하 5:1

껄끄러운 이방 나라, 자국의 왕을 죽인 나라의 장수, 더러운 이방인, 게다가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나병환자. 그 사람 나아만을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인 엘리사가 만나는 겁니다. 그러기에 엘리사와 나아만의 만남의 내용들은 충분히 잘못 이해할만한 많은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엘리사가 나아만을 안 만나줬데.. 왜? 싫으니까 그랬겠지.’ ‘엘리사가 나아만을 손대고 직접 안고쳐 줬데.. 왜?.더럽잖아, 나병환자니까.’ ‘엘리사가 나아만이 주는 돈을 안 받았데.. 왜? 자존심 상하게 적국의 장수에게 돈을 왜 받냐.’ 이런식으로 성경의 본래의 의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해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절들, 나아만과 엘리사가 만났던 이야기를 우리가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해요. 자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한 나라의 군대 장관이 되고 큰 공을 세워서 위세 당당하고 왕의 신임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던 나아만은 그러나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죠.. 아무리 유대인이 아니고 아람사람이라고 해도 나병환자가 어떻게 전쟁을 하고 장관을 하죠? 그래서 원어를 보면 나병환자 더라, 문둥병환자 더라 라고 번역된 말이 “메초라” 라는 말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메초라 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나병, 그러니까 한센병이라고도 하죠. 그러나 꼭 그 병만을 지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예요. 메초라 라고 하면 전반적으로 심한 피부병을 다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하여간 나아만은 이방인인데 게다가 메초라, 즉 악성피부병까지 걸려있었죠. 더러움에 더러움을 더한 겁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나아만. 그러나 그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완전히 더러웠다는 것을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 더러움으로 고통받는 나아만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추입니다. 나아만의 아내에게 이스라엘에서 잡아와 부리던 어린 소녀 몸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왕하 5:3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한 나라의 군대장관이 어린 몸종의 말을 듣고 왕의 친서와, 금과 은과 옷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병을 고치러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아만의 이 상태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성공뒤에 가려진 말할 수 없는 더러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간절함. 인간적인 권력에 의지하는 마음. 금과 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나아만의 상태가요, 먼 옛날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상태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심지어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상태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렇지 않은가, 나는 충분히 정결한가, 나는 위기앞에서 충분히 담대한가, 나는 문제 앞에서 돈과 권력을 의지하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아만은 아닐까. 한번은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자, 이제 이 나아만이 어찌어찌해서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열왕기하 5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왕하 5:9

자기를 찾아온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시다시피 나가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자기 편한대로 산다는 지금도 누굴 만나러 찾아갔는데, 얼굴도 안비치면 화가 납니까 안납니까. 요즘 세상에서도 예의가 아니죠 이건. 기분 나쁜 일입니다. 더군다나 한 나라의 고위 관료인데. 이웃나라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왕의 추천을 거쳐서 찾아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엘리사는 문앞에 서있는 나아만에게 나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나아만이 찾아오기 전에 엘리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아만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왕에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해놓고서는 막상 오니까 쳐다도 안본겁니다. 그러고는 아랫사람을 시켜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왕하 5:10

누가 봐도 화낼만한 이 상황앞에서 나아만이 화를 냅니다. 엘리사는 왜 이런걸까요. 엘리사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별다른 설명은 성경에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어가 엘리사의 행동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이 말을 원어의 용법을 고려해서 고쳐보면, ‘나아만이 엘리사와 함께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니’ 라고 이해할수 있습니다. 왜냐면요, 여기 ‘집’ 이란 말이, 하바이트, 즉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로 자주 쓰이고요. ‘서니, 서다’ 라는 말은요, 아마드, 즉 간구하다, 기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해석이 가능한거죠.

그러니까 엘리사가 나아만을 무시해서 안나온게 아니라 나아만이 직접 하나님 앞에서 간구할 수 있도록 끼어들지 않은 겁니다. 나아만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한거예요. 나병이 걸려서 오랜시간 고생한 나아만이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먼거리 타국에 있는 선지자의 집, 엘리사의 집앞에 섰는데, 그 마음에 얼마나 치료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겠습니까. 나아만은 자신도 모르게 여호와의 전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 있게 된것입니다.

우리가요, 믿음으로 누군가를 도울때 하나님과 그 사람사이에 맘대로 끼어들고 그러면 안됩니다.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중보자인척 한다면, 내가 기도해주면 기적이 일어난다, 이런소리를 한다면, 누군가가 자기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게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더럽고 부정한 나병환자 나아만,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더러운 나아만이 지금 하나님 앞에 선 거죠. 자, 이제 나아만을 하나님 앞에 직접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게한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전하죠. 나아만의 치료에 엘리사는 손끝하나 대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이와 같은 행동에 나아만이 분노하여 펄쩍펄쩍 뜁니다. ‘아니, 나와봐야 할거 아니야, 나와봐야.. 아니, 나와서 보고 만지고 해서 치료해 줘야할것 아니야.. 아니, 우리 땅에는 강이 없어 물이 없어, 내가 무슨 요단강에 목욕이나 하려구 여기 온 줄 알아..’

엘리사의 너무나도 간단한 처방에 나아만이 분노합니다. 나아만의 불만들은 우리가 봐도 참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몸이 많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갔는데, 의사가 ‘물 많이 드세요’ 하면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오른쪽 팔도 아프고, 왼쪽 발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요..’ 하는데 계속해서 의사 선생님이 ‘그러니까 물 많이 드세요’ 한다면 얼마나 황당합니까. 얼마나 화가 납니까. ‘아니, 그렇게 간단하면 내가 병원에 왜 와..’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간단한 처방이 맞는 처방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복음은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쉬어서,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신 그때부터 지금까지 복잡하고 심오하고 도달하기 어려운 것만 좋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복음은 계속해서 도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할리가 없어, 하며 맞서는 거죠. 나아만도 그랬어요. 나아만은 분노하며 떠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런 나아만을 그의 종들이 만류하죠.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왕하 5:13

나아만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려서 요단강,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 요단강에 완전함을 상징하는 수, 일곱번 몸을 담가 몸을 씻습니다. 나아만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케 되었습니다. 더럽고 더러운 이방인 나아만이 간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서고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요단강에 순종하여 직접 몸을 씻으니까, 이스라엘 내에 있던 수많은 나병환자들도 받지 못한 치유의 기적을 누리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치유받은 나아만이 욕하며 떠나갔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도로 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고백하죠.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왕하 5:15

이 구절에서 도로 오다는 단어로 쓰인 슈브는 회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이 회개하며 엘리사를 다시 찾아왔다는 거죠. 회개한 그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선포했다는 겁니다. 또한 회개한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예물을 바칩니다. 원래 처음부터 주려고 가져온 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기쁨으로 바치겠다는데 안 받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한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이방인, 나병걸린 이방인, 어쩌면 미울지도 모르는 적국의 장수 나아만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께 치유받도록 안내하고 도왔지만 엘리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받지를 않았습니다. 2천년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 10:8

어디서 복음장사를 합니까. 어디서 교회장사를 합니까. 나아만을 도운 엘리사를 바라보며 거져 받은 복음을 거저 나누려는 노력의 의미를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겨 넣으시길 소망합니다.

감격에 감동을 한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흙을 아람으로 가져다가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것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요청을 하죠.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왕하 5:18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 ‘목사님, 저희 집이 종가집 이거든요. 저희 아버님이 종손인데 연로하셔서 제사지낼 때 혼자 절을 못하세요. 그래 제가 잡아드려야 되거든요. 그러다보면 제가 같이 절하는 것처럼 되잖아요. 어떻합니까, 용서해 주세요..’ 하는 말입니다.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면요, 나아만이 ‘제가 돌아가면 림몬에게 제사해야 되거든요. 용서해 주세요’ 가 되고요, 우리나라처럼 제사지내고, 고사지내는게 일상화 되있는 나라에서는 ‘제가 어쩔수 없이 제사지내야 되거든요, 고사지내야 되거든요, 가서 절해야 되거든요..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게다가 나아만의 요청에 엘리사가 뭐라고 답합니까. “평안히 가라. 네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한다.” 이런 말 아닙니까. 그래서 이 구절들을 종합적으로 잘못 이해하면, ‘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면, 제사를 지내던, 굿을 하던, 고사를 지내던 아무 상관이 없는 거구나.. 선지자도 이미 용서해준 일이구나..’ 이렇게 착각하게 됩니다.

이게 맞습니까? 성도가 제사지내고 고사지내고 굿해도 됩니까? 그럴리가 없습니다. 나아만의 용서 구함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이유로 조금씩 엇나갈 수밖에 없는, 믿음의 경건함을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죄에 대한 민감한 신앙 양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흔들림 조차도 그저 무감각하게 넘어설 수 없는 나아만 거듭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나아만처럼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도 나아만처럼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모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간구함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순종함으로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이제 열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어쩔수 없이 짓는 죄 앞에서도 민감하게 용서를 구하는 나아만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