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역대하 20장 17-19절 ]
우리는 지난번에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으로 악한 왕인 아합과 그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에 대하여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 대표적으로 악한 왕 아합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때 쯤 남유다에서는 여호사밧이라는 사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여호사밧왕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정에서 성장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그리고 여러분의 아내, 남편, 더 나아가 여러분의 자녀는 어떤 사람인가요. 좋은 사람인가요, 신실한 신앙의 사람인가요, 착한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아버지도 좋은 사람, 어머니도 좋은사람, 남편도, 아내도 좋은 사람, 자녀도 좋은 자녀이면 참 좋겠지만.. 그러나 사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들 좋은 가문을 따지 잖아요. 그런데 그것처럼 어리석은 기준이 또 있을까 싶어요. 아버지가 좋아도 아들이 망나니일수도 있고, 아버지가 망나니어도 아들이 올곧을 수도 있고, 남편이 형편없어도 아내가 훌륭할수도 있고, 같은 울타리 안에 있어도 제각기 다른 것이 사람인데 한데 모아 가족을 평가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대대로 좋은 사람만 모인 가족.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여호사밧의 가족들은 어땠을까요.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 라는 뜻의 여호사밧. 그의 아버지는 아사왕이었습니다. 아사왕은 식어져가는 신앙을 가다듬고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믿으며 남유다를 굳건한 믿음으로 이끈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왕이 믿음가운데 서며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들시들 식어가는 믿음가운데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리더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아사 왕 제십오년 셋째 달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고
역대하 15:10-12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고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신실한 왕이 여호와하나님과 동행하니까 백성들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지 않습니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여호사밧왕의 아버지 아사왕의 이야기 입니다. 여호사밧왕이 아주 훌륭한 아버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아사왕은 끝까지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말년에 아사왕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병들어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여호사밧은 3년간 섭정하다가 왕이 되었는데.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병드신 부모를 모시는 일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까.
여호사밧은 아마도 다짐에 다짐을 한것 같아요. ‘나는 아버지같이 무너지지 말아야지.. 나는 아버지같이 불순종하지 말아야지.. 나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지..’ 마치 백미터 달리기를 준비하다가 신호가 떨어지자 마자 전력으로 질주하는 선수처럼, 여호사밧은 왕이 되자마자 과감하게 온 나라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역대하 17:3-4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역대하 17:3-4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또한 여호사밧은 우상숭배의 대표 겪인 아세라 목상과 산당들도 제거해 냅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산당 즉, 대표적인 우상의 상징들을 없애는 거예요. 그동안 아무 비판없이 매달려온 헛된 것들에 매달리지 않는 거예요.
구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모든 행동의 기준점을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믿음 생활을 바르고 올곧게 돌려놓는 일. 그 일을 여호사밧왕이 서둘러 시행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개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가끔 누가 다짜고짜 ‘이거 해야 해. 이건 하면 안되..’ 라고 말하면, 반발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왜? 왜 해야돼? 왜? 왜 하면 안돼?’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성경 말씀도 그래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러면 ‘왜 공경해야해?’. ‘도둑질 하지 말라’ 이러면 ‘왜 도둑질 하면 안돼? 왜? 왜..!’ 이런 사람들에게 ’넌 왜 그렇게 순종을 못하니!’ 하며 야단치는 것은 맞는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왜라는 것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 맞습니다.
여호사밧왕은 이 일을 잘해냈습니다. 사람들을 세우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동원해서 여러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요.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준거예요. 힘으로 눌러서 끌고 간게 아니라,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왜 도둑질 하면 안되는지, 말씀을 가르쳐서 그에 대한 답을 준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그 말씀이 믿음을 지탱하면요,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온 유대가 훌륭한 왕을 만나서 탄탄한 믿음의 길로 들어선거지요.
여호사밧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고,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아주 강건한 나라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갔어요.
그런데 이렇게 올곧고 믿음에 열심이던 여호사밧이 아주 이상한 일을 벌입니다. 여호사밧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신실한 믿음의 왕입니다. 반면 같은 시대에 북이스라엘에는 악한 우상숭배의 대표주자 아합왕이 있었습니다.
이 여호사밧왕에게는 여호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을 북이스라엘 왕인 아합과 이세벨이 낳은 아달랴에게 장가보냅니다. 그러니까 이 마귀같은 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여호사밧왕이 며느리로 데려왔다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을까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역대하 15:13
이러면서 종교개혁을 했던 아버지 아사보다 오히려 더욱 신실한 믿음을 가졌다는 여호사밧이 이게 왠 일입니까.
자, 이제 아달랴를 며느리로 데려온 이 일로 인해 여호사밧 가족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은 여호사밧 왕의 장자였습니다. 아버지 여호사밧은 장자인 여호람에게는 왕권을 물려주고 여호람의 여섯 동생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어서 다같이 잘 살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한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은 이미 아버지 여호사밧의 그 선한 심성이 아니었어요. 여호람이 나이 서른에 여호사밧을 이어 왕이 되었는데 힘이 생기자 마자 동생들 여섯을 싹다 잡아다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부렸어요. 그러더니 그 죄값으로 병이들어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으로 고통스럽게 죽고 맙니다. 서른살에 왕이되어서 8년을 다스렸으니까, 40도 안된 새파란 나이에 고통스럽게 죽은겁니다. 여호람이 동생들을 죽이고, 자기는 병들어 죽고, 여호사밧의 아들들은 전부 다 몰살을 당한거죠
자, 이제 여호사밧의 손자인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똑같이 못되게 굴었어요. 아하시아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합과 다를바 없는 악인이었습니다. 이 아하시야왕은 왕이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는 북이스라엘로 갔다가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을 멸하기 위해 준비한 자인 예후에게 잡혀 죽습니다.
남편도 아들도 다 죽자, 아합의 딸이자 여호사밧왕의 며느리, 악의 근원되었던 아달랴가 직접 남유다 왕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뒤에서 남편과 아들을 조정해 악을 부리다 직접 전면에 나선거예요. 그러고는 모든 왕족들을 다 잡아 죽입니다. 온 유다가 이 가족들로 인해 말할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사밧왕의 가족사입니다.
그렇게 신실한 믿음의 왕 여호사밧이 아합가정과 연혼을 한 것은 그의 신앙적 교만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적 교만함은 말할수 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서 이 정도 유혹은 충분히 넘어갈수 있어. 괜챦아!’ ‘아, 내가 어디 남들 때문에 믿음이 흔들릴 일이 있나.. 그거 다 초신자들이나 하는 행동이야..’ ‘근묵자흑이라고? 그런게 어디있어? 그거 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야. 나만 똑바르면 어딜가도 까딱없어..’
근거없는 신앙적 자만심. 자신의 믿음을 과대평가하는 교만함. 미리 조심하고 미리 피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 아닙니까.
자,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줄로 압니다.
‘아, 그거 다 여호사밧 본인이 죽고 나서 일어난 일이 잖아요. 정작 본인은 안 혼났잖아요. 죄는 여호사밧이 짓고 고통은 딴 사람들이 당하나요?’
그럴까요? 여호사밧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나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신앙적 자부심으로 단단하던 여호사밧이 정치적 이유를 들어 북이스라엘의 며느리를 본후 이년 후에 이제는 더 이상 적이 아니고 사돈지간이 된 아합왕을 만나러 갑니다.
아합이 아주 후하게 여호사밧왕을 대접하지요. 그리고는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을 치자고 강권합니다. ‘아니, 우리가 사돈지간인데.. 아니, 우리가 같은 민족인데.. 아람을 막아야 북이스라엘이 편하고 북이스라엘이 편해야 남유다가 편한 것 아닙니까..’ 아합왕이 강권을 하죠.
아,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여호사밧은 빠져나올수 없었어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올무에 잡혀서 아합의 요청을 거절할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미가야가 패전을 예언했지만 여호사밧은 빠져 나올수가 없었습니다.
죄의 올무가 이렇습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타당해 보이는 이유를 들며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에 우리를 붙잡고 죄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려갑니다. 싹부터 잘라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죄 앞에 올곧게 서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 전쟁에서 아합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호사밧은 거의 죽을 뻔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여호사밧이 선견자 예후를 만나죠.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역대하 19:2-3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이 말을 듣고 알았어요. 뭘 잘못했는지. 자신의 죄가 뭐였는지. 왜 자기가 죽을뻔 했는지. 아합왕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수도 있었음을 여호사밧이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셨는지,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여호사밧왕이 깊이 깨닳았어요.
회개한 여호사밧이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역대하 19:4
사람들을 시켜 하나님을 전하던 여호사밧이 이제 직접 유다땅 남쪽끝 브엘세바로부터 유다땅 북족끝 에브라임 산지까지 온 나라안을 두루 다니며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고 식어버린 믿음을 다시 깨우고, 버려졌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일에 직접 나섰습니다.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진실과 성심을 다해 여호와를 경외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사밧의 회개입니다.
비록 그가 시작한 죄는 자라서 죽음의 열매를 맺었지만, 그래서 그의 아들 며느리 손자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여호사밧은 회개함으로 그 죽음의 열차에서 내려설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알고 지은죄, 모르고 지은 죄, 내 스스로 지은 죄, 남 때문에 지은 죄로 인하여 따박따박 죽음으로 달려가는 죽음의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일. 그 결단이 여러분의 인생속에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 후에 여호사밧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일에 힘쓴 후에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쳐옵니다.
역대하 20:1-2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역대하 20:1-2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정치적 안정을 위해, 북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원하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여호사밧왕.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합왕의 딸이라도 얼마든지 컨트롤 할수 있다는 신앙적 교만함에 빠져있던 여호사밧은 그러나 이 위기 앞에서 이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호사밧은 온 백성에게 금식하며 여호와께 기도하기를 명합니다.
이게 별거 아닌것 같지만요, 온 백성에게 목숨을 걸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한 왕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열왕중에 처음이었습니다.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사람의 방식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고서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기도가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사밧의 회개는 죄에서 돌아섬으로 멈춰있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유다왕국은 사실 군사적으로도 많이 준비가 된 나라였어요. 그러나 여호사밧의 고백을 보십시요.
역대하 20:11-13의 말씀입니다.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역대하 20:11-13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여호사밧이 위기 앞에서 사람의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을 신뢰하며 찬송하며 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엄청난 수의 연합군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자중지란으로 인해서 유다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 옛날 여리고 성이 무너지듯이 그 견고해보이는 적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는 심판하셨다는 이름의 여호사밧왕과 그 가족의 일생을 보시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십니까.
죄 앞에서 자유로울수 없으나, 회개함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저는 이 말씀들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죄는 죽음으로 징벌하시되 회개하는 자를 용서함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