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열왕기상 17장 20-24절 ]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열왕기상 17:20-24
여러분, 여호와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시죠.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여호와 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번 여호와라고 쓰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히브리 말로 하면 “엘리야후“ 입니다. 엘리야후. 엘리야후를 짧게 읽으면 엘리야가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그 이름에서부터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이름이지요.
자, 이 놀라운 선지자가 이제 성경속에 등장하는데, 누구와 함께 나타나죠?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함께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을 세우고 악을 행하다 죽은 이후로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같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아합”이라는 사람이 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진짜 1등이었어요. 제일 못됬어요. 얼마나 악한 왕이었는지 몰라요. 나쁜걸로 일등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아합왕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열왕기상 16:30-33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나쁜 걸로 일등이라는 거죠. 바로 이 아합왕 앞에 바알을 대놓고 섬기는 우상숭배의 대표주자 앞에 바알이 그와 함께있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한 아합왕 앞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이름을 가진 엘리야가 섭니다.
얼마나 극명한 대립의 구도입니까. 손끝만 닿아도 베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칼날같은 대립 아닙니까.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합은 왕이였어요. 나라가 크던 작던 왕을 아무나 만날수 있었겠습니까.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나려면 오다가다 우연히 만날수 있는게 아니었겠죠. 먼저 아랫사람을 만나서 ‘내가 엘리야인데, 왕을 좀 만나게 해주세요’ 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알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는 아합왕한테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 이름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면 이건 만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일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지만 엘리야는 처음부터 목숨을 거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엘리야는 아합왕을 만났습니다. 그게 어찌 가능한 일이었는지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엘리아가 어떻게 아합왕을 만났건간에 아합왕을 만난 엘리야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열왕기상 17:1
얼핏 보기에 이게 뭐 대단한 말인가 싶지 않습니까? 죽이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마귀의 자식아!’ 하면서 혼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앞으로 비가 안 올꺼야.. 내가 비오라고 하지 않으면 비가 안 올꺼야.. 진짜야”. 엘리야가 이 말 한마디 하고 말았단 말이에요.
예전에 여로보암왕이 벧엘에서 엉터리 제단을 만들고 자기 맘대로 제사를 지낼때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뭐라고 예언합니까. 다윗의 집안에 요시아왕이 나타나서 너와 네가 만든 엉터리들을 다 멸망시킬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에 비하면 참 순한 예언 같지요. 참 부드러운 저주 같아 보여요.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연약한 예언이 아닙니다. 바알신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풍요를 상징하는 신입니다. 농사의 신입니다. 농사는 물이 없으면 절대로 성공할수 없습니다. 물이 말라 버리면 농사는 완전히 망합니다. 그렇다면 그 물은 어디서 옵니까? 비가 와야죠. 아합왕이 왜 바알을 섬깁니까? 바알이 도와서 비도 오고 농사도 잘 되고 돈도 많아지고 풍요로워 지고 힘도 세지고 살만해지고.. 하는 그 욕심과 그 바람으로 바알을 섬기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 가 서서 “너, 네가 믿는 바알은 가짜야. 너, 네가 원하는 성공은 바알이 주는 것이 아니야. 너, 네가 바라는 풍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바알은 비는 그만두고 이슬도 맺히게 못하는 허상이야. 너 바알 믿다가 굶어 죽을 거야. 말라 죽을 거야. 네가 믿는 것 틀렸어!
‘여호와는 하나님이다’ 라는 이름을 가진 내가 간구하지 않는 한 비는 한방울도 오지 않을 거야.”
엘리야가 이렇게 이야기 한 겁니다. 엄청난 말을 한 겁니다.
누가 왕한테 틀렸다고 합니까. 누가 왕한테 네가 믿는 게 엉터리라고 말합니까. 누가 왕한테 당신때문에 다 굶어 죽을 거라고 말합니까.
엘리야가 그랬어요. 목숨을 건 엄청난 용기였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엘리야가 도망갔어요. 아,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도망가라고 하셨지만 분위기상 이건 반전이 좀 심하죠. 그 정도 했으면 그 자리에서 그냥 장렬히 전사하는게 맞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냥 조그마한 시냇가, 그릿 시냇가로 도망가서 숨었어요. 그리고 그 시냇가에 가서 멍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겁니다. 까마귀가 밥 가져다 주면 그 밥 먹고, 시냇물 마시고, 까마귀가 또 밥 가져다 주면 그 밥 먹고, 시냇물 마시고, 또 자고 그러고 있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아합왕 앞에 섰던 순간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무기력해 보입니까. 얼마나 한심해 보입니까.
아합왕 앞에서 1분도 안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나서 엘리야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릿 시냇가에서 그렇게 지내고 있었습니까. 비가 안와서 시냇물이 마를때 까지 거기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있었다는거죠. 참 초라해 보이죠.
그러나 이 시간은 그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초라하고 한심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하나님은 비를 멈추시는 역사를 일으키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잠잠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일이 그저 크고, 광대하고, 놀랍기만을 바랄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많은 영향력을 일으키고 많은 박수를 받기만을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처럼 아무도 없는 시냇가에서 혼자 잠잠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확인해야할 시간도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을 움직이시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인식의 부재에서 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물이 마르도록 그릿 시냇가에 머물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열왕기상 17:8-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엘리야가 도망가 있던 그릿 시냇가는 요단강 동쪽 디셉, 그러니까 엘리야의 고향에서 가까운 시냇가였습니다. 당연히 잘아는 동네였겠죠. 도망은 왔지만 자기 고향땅이고, 잘 아는 동네라면 조금은 덜 불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시돈땅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사르밧은요, 디셉 바로 옆 동네가 아닙니다. 이스라엘땅 북쪽끝을 넘어가는 동네입니다. 게다가 거기는 아합왕의 아내인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다스리는 시돈땅 입니다. 대적자의 본거지 바로 아래로 가라는 겁니다.
아니 이스라엘 내에서도 목숨을 걸고 도망다녀야 하는 처지인데 바알신의 본거지로 가라시면 어떻게 합니까. 우상의 본거지로 가서 여호와의 선지자가 뭘 할수 있습니까. 홀홀 단신인 엘리야가 살아남을 수는 있는 걸까요. 게다가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과부가 자신을 돕는다는 것, 이거 믿을 수 있는 걸까요.
그러나 엘리야는 전혀 주저함없이 사르밧으로 갑니다. 약 150-160km 되는 먼 거리를 망설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나아갑니다. 가라시면 가는 겁니다. 주께서 가라 하시면 가는 거예요. 이것이 엘리야의 믿음입니다.
엘리야가 이제 며칠을 걸어서 사르밧 성문에 이르렀죠. 그런데 거기 아주 초라하기 짝이없는 한 여인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아.. 이 여자구나. 하나님이 말씀한 과부가 바로 이 여자구나..’ 엘리야는 한눈에 그 여인이 하나님이 준비한 과부임을 알아챘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르밧 과부“ 이렇게 써붙이고 다닌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엘리야는 한눈에 그 여인을 알아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이리 좀 와보세요. 아주머니, 저 물 좀 주세요.. 제가 아주 목이 많이 말라서 그래요. 물 좀 떠다주세요.” 그 당시 그곳에서 나그네에게 물 한모금 대접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어요. 사막이 많은 지대에 보통 그런 풍습이 있죠. 조금 황당해 보이는 이 광경은 그러나 그 당시 그곳의 사정으로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누가 봐도 가난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그 여인에게, 엘리야가 자기에게 물을 떠다주러 가는 그 여인의 뒤에 대고 “거, 오는 길에 떡도 좀 갖다줘요..” 이렇게 얘기 한거야요.
아니, 이게 무슨 염치 없는 짓입니까. 맞겨놨나요.. 뭐,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언제 봤다고. 그 여인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7:12 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열왕기상 17:12
화낼만 하지 않습니까. 화낼만 하지요..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 여인에게 떡 한 조각은 전부인데.. 그걸 달라는건 부당하지 않나요.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인 자신에게 자신이 가진 마지막 것 전부를 요구한다면 누가 그 말을 듣고 따를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황당함에 분노하는 그 과부를 향하여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화내지 말라가 아니에요. 두려워 말라! 먼저 나를 위하여 떡 하나를 준비해 가져오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이름의 나 엘리야를 먼저 섬기라. 그리하면 생명의 비가 다시 내리는 그 순간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열왕기상17:13-17)
엘리야의 이 놀라운 선포는 훗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다시 한번 선포되어집니다. 마태복음 6장 31-3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태복음 6:31-33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약속을 얼마나 믿으십니까. 얼마나 확신하며 따르실수 있습니까.
엘리야를 만났던 사르밧 여인은 엘리야의 약속,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열왕기상 17:15-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사르밧 여인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일상속에서 기적을 경험한 거예요.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거예요.
그런데!
순종함으로 사는 문제가 해결 됐는데.. 그런데 죽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열왕기상 17:17 의 말씀입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열왕기상 17:17
갑자기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엘리야에게 이 과부와 아들은 누구입니까. 아합왕 앞에서 1분도 안되는 짧은 설교를 마치고 도망나와서 시냇가에 혼자 그렇게 쭈구리고 앉아서 까마귀나 보다가 그 놀라운 선지자 엘리야가 직접 한 가정에 입주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이 바로 이 과부와 아들 아닙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의 대상이요, 둘밖에 없는 교인이었단 말입니다.
엘리야에게 그들은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죽었어요. 그것도 나이든 과부가 아니라 젊은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일은 아들의 죽음을 맞이한 과부에게도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딸랑 두명 놓고 목회해오던 엘리야에게도 엄청난 고난이자 고통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식을 잃은 사르밧 여인은 되도 않는 말로 엘리야에게 원망을 터트려 놓습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 사는 문제를 도왔던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들의 죽음이 엘리야의 탓인 양 울부짖습니다. 엘리야의 가슴이 찢어져 내립니다.
엘리야는 너무 슬펐어요. 너무 당혹스러웠어요. ‘이건 아니잖아.. 하나님, 이건 진짜 아니잖아요.’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십니까.. 내가 돌보는 가족의 아들이 죽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말씀을 가르치는데 그 아들을 치십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열왕기상 17:20)
엘리야가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다락방 자기 처소에 눕힙니다 . 그리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립니다.
내 생명을 쪼개서 이아이에게 주시옵소서..
내 생명을 쪼개서 이 아이에게 주시옵소서..
내 생명을 나누어서라도 이 아이를 살려 주시옵소서..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이 아이를 살려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의 문제는요 삶의 문제보다 큽니다. 우리는 누구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엘리야를 도움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받았던 사르밧 과부는 그러나 죽음의 문제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수 없는 그 순간에 엘리야가 몸을 펴서 아이를 덮습니다. 내 생명을 나누어서라도 아이를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그날 이후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 죽음을 피할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팔을 벌려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누르시고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그 아이를 다시 살린것과 같이 예수의 십자가 달리심으로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라도 다시 사는 부활생명을 얻었습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풀수없던 죽음의 문제를 예수를 통하여 해결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 앞에 서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통한 부활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살아난 아이를 끌어 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사르밧 여인이 이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열왕기상 17:24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우상에 찌들어 있던 한 여인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은 후 드린 이 고백이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