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열왕기상 2장 1-10절 ]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열왕기상 2장 1-10절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무슨 말을 할까요. 말을 할줄 모를뿐더러 말을 할수 있다고 쳐도 보고 듣고 겪은게 없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어린 아기가 하는 말에 의미를 두며 주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그 아기의 부모가 옹알거리며 말하는 아이를 사랑으로 바라볼 뿐이지요. 중요한 의미를 전하는 옹알이는 세상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던 아기가 자라고 한 평생을 다 살고 나서 가장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기는 말, 우리가 흔히 ‘유언’ 이라고 부르는 그 말은 떠나가는 그 사람의 인생속에 가장 소중한 가치를 표현함과 동시에 듣는 이들에게는 귀담아 듣고 마음에 간직할만한 소중한 삶의 기준과 교훈이 되는 말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보니까 정말 좋더라.. 너희도 꼭 이렇게 살아라..” “내가 이렇게 살아보니까 정말 어렵더라. 너희는 그러지 마라.” 이런 말들이 유언으로 전해지지 않습니까. 물론 내 돈을 이렇게 저렇게 나눠가져라는 등의 별볼일 없는 유언도 있겠지만, 유언은 한 사람의 가치관과 삶을 확정적으로 보여주는 심볼과도 같다는 거지요.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돌아가시면서 ‘난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어..’ 라고 하셨다고 해서 제가 아주 크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목회를 그렇게 크게 하시고 수많은 일들을 이루고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놓고 재미가 없었다고 울먹이며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고이고이 감춰 두었던 그분의 가치관, 목회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라는 생각, 하나님의 일을 자원하는 기쁨에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분의 유언에서 드러나고 만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언은 한 사람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는 심볼이 되어질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다윗의 유언을 통하여 ‘다윗이라는 사람은 누구지’ 라는 질문에 좀 더 깊이 있는 답을 얻기 원합니다.
다윗이 아주 늙어 거동도 편하지 않던 때에 다윗의 아들중 아도니아는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아도니아는 말하자면 넷째죠. 첫째인 암논은 압살롬에게 죽었고, 둘째는 이름은 나오지만 성경속에 어찌 됬다는 말이 없는것으로 보아 일찍 죽었다고 생각되며, 셋째였던 압살롬은 다윗왕과 맞섰다가 요압에게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압살롬 다음인 아도니아가 아버지인 다윗왕 다음으로 왕이 되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죠. 그냥 순서상 누가 봐도 그럴만한 그런 일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랫동안 다윗을 도왔던 군대장관 요압도, 제사장 아비아달도 아도니아를 도왔죠.
그러나 아도니아아가 왕이 되는 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솔로몬이 자신의 왕위를 이을 것이란 말을 듣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용서의 상징이었죠. 다윗과 바람을 핀 밧세바의 아들이 솔로몬 아닙니까. 다윗은 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웁니다.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열왕기상1장 38-39절
자 이렇게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놓고 다윗은 죽기 전에 솔로몬을 향하여 말합니다. “솔로몬아 내가 이제 곧 죽을텐데 너는 대장부가 되어라!”. 영어로 “be strong, act like a man”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난 여자인데.. 나하고는 상관 없는 말인가 보다..’. 그럴까요? 대장부가 되라는 말이 마초같은 남자가 되라는 뜻일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대장부가 되라고 한 말은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의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을 뜻합니다. 남자의 상징인 강함을 가져다가 강한 의지와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거지요. 대장부가 되라는 말 다음으로 나오는 구절은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의지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
열왕기상 2장 3절
강한 의지와 굳은 믿음을 가지고 율법을 지켜라! 이것이 다윗의 첫번째 유언인 것입니다. ‘솔로몬아! 그냥 안돼. 쉽지 않아. 단단히 맘 먹어야돼. 의심없이 확신을 갖고 믿어야 돼. 그래야 율법을 지킬수 있어.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삶의 방법들을 따라갈수 있어.’
…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열왕기상 2장 3절
자 그런데 이 말을 듣다 보니까 조금 아쉽지 않나요. 강한 의지와 믿음으로 율법을 지키면 형통한다. 우리 흔하게 ‘만사형통 하세요’ 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형통이라는 말은 아주 세속적이어 보입니다. 강한 의지와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얻는 것이 고작 세상적인 풍요라면 다윗이 죽어가는 마당에 유언으로 그걸 강조했다는 것은 조금 많이 아쉽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형통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형통이라고 번역된 단어 ‘사칼’ 은 ‘성공하다, 잘되다’ 이런 뜻도 있지만, 동시에 ‘이해하다, 지혜롭다‘ 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강한 의지와 믿음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면 잘산다, 성공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강한 의지와 믿음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면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솔로몬에게 준 이 유언은 남자건 여자건 그때나 지금이나 솔로몬이건 아니건 간에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평생을 굳은 의지와 믿음으로 살아온 다윗이 ‘너도 그래라, 내가 살아보니까 그게 최고더라! 너도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와 지혜와 진리를 기쁨으로 누리거라’. 이렇게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뭐라 유언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열왕기상 2장 4절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진실되게 하나님이 주신 명령인 율법을 행하며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왕권이 떠나지 않을 것이란 약속 아닙니까.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아, 구약시대 사람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율법을 지켜야 되는 거였구나.. 그땐 그랬구나.. 하지만 우린 율법시대가 아니니까 오늘을 사는 크리스챤하고 이 말은 상관이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다윗의 유언은 그저 구약시대에만 속하는 걸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다윗의 이 유언은 지금 다윗이 죽기전에 급하게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백성에게 선포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신명기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신명기에 쓰인 마음은 ‘레바브’, heart를 의미합니다. 여기 ‘뜻’으로 쓰인 단어 ‘네쉬피’ 는 soul을 의미하지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되게 행하라고 유언한 다윗도 똑같은 단어인 레바브와 네쉬피, 즉 heart와 soul을 다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라고 하였죠. 다윗의 유언은 급조된것이 아니라 이미 신명기에 나와있는 말로 다윗이 평생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았던 말이라는 것이죠.
구약의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율법의 행함으로 표현하는 시대였기에, 강한 의지로 강한 믿음으로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 사랑을 율법을 행하며 지킴으로 나타내라고 유언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시대인 오늘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는 뭐가 다릅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첫 계명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장 30절
고 하셨습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마음은 heart, 목숨은 soul, 뜻은 mind, 힘은 strength 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준 유언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똑같습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믿음이냐 율법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유언은 구약의 시대에만 유용한 한시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도 솔로몬이 다윗을 통하여 그 말씀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그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윗이 남긴 유언중에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할 내용은 ‘요압을 그냥두지 마라,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라, 시므이를 그냥두지 말라’는 등의 이야기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말들은 다윗이 참 좁은 마음을 가진 볼품없고 비겁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앞뒤 전후 사정을 몰라서는 다윗이 이런 말을 한 이유를 바르게 알 길이 없습니다.
요압은 누구입니까. 요압은 다윗의 누이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요압의 외삼촌이 되는겁니다. 요압은 평생을 다윗을 위해 전쟁에 나아가 싸웠습니다. 다윗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이 개인적으로도 요압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는지 몰라요. 심지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라는 명령에 요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일을 해주지 않습니까. 좋은일 궂은일 가리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 요압을 없애라고 솔로몬에게 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그랬을까요?
요압은 다윗에게 중요한 사람인건 맞는데, 충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몇가지 큰 잘못을 했죠. 사울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때 상대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은 다윗을 찾아와 평화로운 무혈 통일을 제안했습니다. 다윗은 기쁘게 그 제안을 받았어요 그리고 아브넬을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다윗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동생을 아브넬이 죽였다는 개인적인 원한을 이기지 못하고 아브넬을 죽여버리죠. 또 요압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한 아마사를 자기 맘대로 죽여버렸습니다. 서둘러 반란군을 제압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세웠죠. 하지만 속마음은 그저 자신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요압은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도 죽였죠.
요압은 다윗을 돕기도 했지만 다윗을 거역하고 속이며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아무리 도움을 많이 받았어도 악에 대하여 징벌을 내리라는 것이 다윗의 유언이었습니다.
바르실래는 또 누구입니까. 바르실래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쫒겨 달아날 때, 다윗과 그 일행을 극진하게 도운 인물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에게 등돌리지 않으며 도운 인물이죠. 그 선함에 보답하라는 것이 다윗의 유언입니다.
시므이는 반대죠.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때 저주하며 모욕하며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그를 그냥 두지 말라는거죠. 어찌 보면 그냥 속좁은 다윗의 복수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다윗의 이 말들은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고 잘한 사람은 상을 받는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유언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는 중요한 원리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건 그러지 못하건 간에 공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잘하면 상받고, 잘못하면 벌받는 공의로움에 대해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잘했으면 상 받아야죠. 잘못했으면 벌 받아야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공의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은 더더욱이 하나님의 공의위에 바르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유언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어떻게 해서 깨어집니까? 잘못을 알지만 ‘에이, 친한잖아..’ ‘에이, 신세도 졌는데..’ ‘에이, 친척이잖아.. 동향이잖아.. 동문이잖아..’. 이렇게 깨어집니다. 또한 공의는 어떻게 해서 깨어집니까? 도움을 받았지만 ‘아, 그거 당연한거 아니야..’ 하며 감사함을 잃어버릴때, 잘한거 알지만 ‘에이, 칭찬하고 격려하려면 돈도 나가고 ..’. 자신의 욕심이 앞설 때 공의는 그렇게 깨어집니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공의는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속에서 아주 쉽게 깨집니다. 더욱이 성도들에게는 공의가 사랑과 용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느껴질때가 너무 많아요. 부당한 욕심이나 부당한 친분때문이 아니라도 사랑을 행하라는 가르침이 공의와 반대되게 느껴질때가 많단 말입니다.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잘못했어도 용서해야지’
뭐가 맞습니까. 여러분은 이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이게 쉬운 문제일까요? 공의와 사랑. 공의와 용서. 그 경계는 어디입니까? 쉽지않은 문제지요. 공의를 행하면서 사랑으로 이따금 봐줍니까.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속에서 공의와 함께 사랑, 용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구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지 않습니까.
죄값을 치르시는 예수님의 공의와
죄없이 죄값을 치르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다윗이 그렇게 유언으로 남기며 강조했던 하나님의 공의는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사랑과 함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완성되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유언처럼 마음을 다하여서 목숨을 다하여서 뜻을 다하여서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소망합니다. 다윗의 유언처럼 성도로서 세상을 살아가며 공의를 이루는 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어 가신 그 길을 따라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