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신명기 22장 1-4절]
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신명기 22:1-4
방관자 효과
지난 수요일 저녁 퇴근하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우산을 들고 전철역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내 앞에 무거운 물건을 든 채,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비를 맞고 있는 2명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우산을 씌워줄까 고민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곳에는 나 말고도 우산을 든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도 나랑 같은 마음일까 생각했지만, 나를 포함하여 우산을 든 누구도 그 여학생들에게 우산을 내민 사람은 없었습니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전철을 타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집에 오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당황스러워 하는 여학생들에게 그 자리에 있던 나도 다른 사람들도 방관자였던 셈입니다.
방관자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나설 것으로 생각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방관자효과의 대표적인 사례로 1964년 미국 뉴욕주 퀸스 지역에서 일어났던 제노비스 사건이 있습니다. 28살의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새벽에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주택가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제노비스가 도와달라고 소리를 치자 주변 아파트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치자 강도는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제노비스가 부상을 당한 몸으로 얼마가지 못하고 어떤 가게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도망쳤던 강도가 돌아와서 다시제노비스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다시 아파트에 불이 켜졌고, 강도는 또 다시 도망을 쳤습니다. 제노비스가 힘겹게 자기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강도가 또 다시 나타나 결국 제노비스를 죽게 만든 사건입니다. 제노비스가 강도를 당하는 사건을 여러 사람들이 목격했지만, 누군가 도와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방관하는 사이, 제노비스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사건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납니다. 지난 5월 어느 날 서울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오전 6시에 한 60대 남성이 마약을 한 40대 남성에게 묻지 마 폭행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그곳을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가해자를 말리지도, 피해자에게 응급조치도 하지 않아 결국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렀으며, 나중에 경찰이 수사를 하면서 길 건너편에 있는 CCTV를 보니 그 시간에 53명의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한국판 제노비스 사건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매스컴에서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는가라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방관자의 모습은 집단속에 있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못 본 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돕겠지. 반드시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닐 거야라는 생각으로 , 또는 귀찮고 괜히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또는 그를 돕는데 필요한 나의 시간과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못 본 체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모세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가르침 중의 하나로, 주로 재산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는 방관자효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못 본 체”하지 말라
하나님은 본문에서 형제에 대하여 “못 본 체”하지 말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에 대하여 방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형제나 이웃이 잃어버린 소나 양을 발견하면 못 본 체하지 말고, 그 소나 양을 데려다가 그 주인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에서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경우라도 못 본 체하지 말고 데려다가 그 주인을 알게 될 때까지 보살폈다가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에서는 소나 양뿐 아니라 나귀이거나 의복이라도 그리할 뿐 아니라, 형제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지 못 본 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에서는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았을 대도 못 본 체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이웃이 잃어버린 짐승을 데려다가 그 주인을 찾기까지 데리고 보살피는 일은 귀찮고, 신경이 쓰이고, 나의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다거나, 또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다면, 내 시간과 비용이 아깝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마음으로 얼마든 못 본 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하여 “못 본 체”한 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방관자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강도에게 당하고 있는 제노비스를 집안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피투성이가 된 채 길에 쓰러져 있는 60대 남성을 그냥 지나쳐버린 53명의 행인들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절에서 “못 본 체하지 말고 반드시 형제를 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못 본 체”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도 이웃의 어려움을 못 본 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되어 길에 버려졌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못 본 체하고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상처에 응급처치를 해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인에게 돈을 주며 그를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수고와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못 본 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율의 말씀은 자신의 율법 지식을 뽐내던 율법교사에게 지식이 아닌 실천하는 삶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도 성경 지식을 자랑하며, 예배와 여러 가지 교회 행사와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정작 형제와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을 못 본 체한다면,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 체한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며, 제노비스와 묻지 마 폭행을 당해 죽어가는 60대 남성을 못 본 체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못 본 체”하지 말아야 할 대상의 확대
그런데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못 본 체하지 말아야할 대상을 더 넓게 가르쳐주십니다.
[출애굽기 23:4-5]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출애굽기 23:4-5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원수와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못 본 체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불 때, 못 본 체하지 말아야할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 민족이 이방인보다도 더 못하게 여기는 사마리아인을 선한 이웃으로 가르침으로써 못 본 체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더 넓히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아픔에 대해 못 본 체하지 말아야할 책임이 있을 깨닫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을 보다 넓은 세상으로 확대하여 못 본 체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대하여 못 본 체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우리는 세상의 법을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방관자가 됩니다. 세상의 법으로는 이웃의 고통에 대한 방관과 무관심이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관과 무관심이 오히려 상식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웃의 어려움을 못 본 체하지 말라는 말씀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본문 4절 말씀에도 “반드시 형제를 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같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요한일서 3:17], [야고보서 4:17]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한일서 3: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7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줘야 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결국 못 본 체한다면, 그것은 마음을 닫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은 죄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못 본 체”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할 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에도 기회와 때가 있다!
[잠언 3;27-28]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잠언 3:27-28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이라는 말씀은, 힘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선을 베풀 힘이 언젠가는 사라질 때가 옵니다. 국수 사역을 하고 나서, 왼 쪽 어깨에 오십견이 왔습니다. 문득 ‘이러다가 왼 팔을 못 쓰게 되면 어떻게 국수를 만들지?’라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건강은 잃고 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돈을 좀 더 벌고 난 뒤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이 많아지면 더 벌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지금 베풀줄 모른다면, 더 부자가 된다고 해서 베풀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재물도 사라지고 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못 본 체”하지 말아야 할 그 이웃이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 지금 도움을 청하러 온 이웃에게 내일 다시 오라고 했을 때, 그 이웃이 내일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 도움을 줘야 할 이웃이 있는데, 그 이웃은 내가 못 본 체하지 않을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심하거나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그가 내 곁은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실 수 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려운 이웃을 “못 본 체”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것도 다 기회가 있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무언가 힘이 있고, 재능이 있고, 재물이 있을 때, 내 곁에 내가 “못 본 체”하지 말아야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실천에 옮길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열매를 맺으십니다.
“못 본 체”하지 않는 삶의 열매
한센병이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문둥병 또는 나병이라고 불렸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푼 대표적인 기관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사역한 곳으로도 유명한, 바로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애양원입니다. 이 애양원의 시작은 길에서 만난 한센병에 걸린 여인을 못 본 체하지 않은 한 선교사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의 이름은 포사이드입니다. 그는 전주에서 의료 선교를 하다가 광주에서 사역하는 오웬 선교사가 지방 전도를 갔다가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치료를 위해 광주로 향하던 중 나주에서 한센병에 걸린 한 여인이 길에서 가마니를 덮고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한센병 환자를 보면 전염이 될까 두려워 누구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에게도 버림을 받은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 여인을 못 본 체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부축하여 자신의 말에 태우고 광주로 왔습니다. 그 사이 오웬 선교사는 폐렴으로 순교를 합니다. 그래서 포사이드 선교사는 오웬 선교사가 쓰던 침대에 그 여인을 눕히고 정성껏 돌봐줍니다. 냄새나고 흉한 모습에, 또 옮을것이 두려워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한센병 환자를 선교사가 돌봐주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한센병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들을 치료해주면서, 그의 선행에 감명을 받은 조선 사람들과 함께 광주나병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 병원이 애양원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한센병 환자를 못 본 체하지 않고 돌봐준 포사이드 선교사의 사랑에 하나님께서 복을 더하셔서 큰 열매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형편이 좋을 때는 서로 밥 먹자, 차 마시자, 놀러 가자며 챙겨주다가 그 형제자매와 이웃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슬그머니 연락을 피하고 “못 본 체‘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가 될 것이지만, 그런 삶은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 믿는 사람들도 말로는 형제요 자매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냥 “못 본 체”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런 모습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돌아보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못 본 체”하지 말아야할 이웃이 우리 곁에 있는데, 귀찮은 마음으로, 내가 써야할 시간과 비용과 수고가 아까운 마음으로, 바쁘니까, 돈이 없으니까, 누군
가 하겠지 등등의 핑계를 대는 마음으로결국에는 “못 본 체”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고통과 아픔을 “못 본 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어려움에도 “못 본 체”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고 몸이 약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못 본 체”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못 본 체”하지 않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맺으실 풍성한 열매를 함께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