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이인엽 목사

[ 사무엘상 17:41-51 ]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사무엘상 17:41-51

성경, 특히 구약의 많은 부분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저 먼나라 중동의 한끝자락, 그것도 아주 자그마하고 힘도 없던 나라, 그나마 만주벌판이라도 호령해봤던 우리나라의 역사보다도 더욱 작고 더욱 특별할게 없어보이는 그나라 이스라엘의 역사가 도대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걸까요.

몇 천년이 넘어서 이스라엘과 전혀 가깝지도 않은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그 오래전의 역사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요.

그것은 그렇게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자그마한 이스라엘을 들어 온 인류구원의 열쇠를 주신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속에 직접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조그마한 사막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역사,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기억하여 할 중요한 역사라는 말씀이죠.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역사속에 다윗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다윗은 성경속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중에서도 우리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과 아주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일, 다윗이라는 인물을 자세히 알아가는 일은 그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을 자세히 보는일이자 그와 함께 일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일이 됩니다.

자, 이 다윗이 성경에 등장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람은 누구였죠? 사울왕이죠. 허우대가 멀쩡했던 사울이 그렇게 어이없이 하나님을 오해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야기를 우리는 지난번 설교에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은 사울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분명히 일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왕을 달라고 졸라대더니 왕을 얻고 전쟁에 이기니까 고작 한다는 짓이 뭐였습니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모든 좋은 것을 살짝살짝 따로 챙기지 않았습니까. 대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죠. 그러면 왜 사울만 망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같이 죄를 졌는데 이스라엘도 다 망해야 공정하지 않습니까. 블레셋이건 암몬이건  누구든 이방인들을 통해 싹 진멸당함이 맞지 않나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왕을 주십니다. 그 왕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다윗의 뜻은 보통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중보자’라는 뜻이죠.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중보자 다윗을 통하여 멸망당해야 마땅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못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죄의 값으로 멸망당해야 할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인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어서 선택받은 자를 회복시키시는 모습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시작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고향이 베들레헴이라는 데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죠.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 인데요,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살아있는 떡이신 예수님이  떡집이라는 이름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다윗의 고향이 바로 이 베들레헴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윗과 예수님이 아주 뚜렷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거지요. 

자, 이런 다윗은 성경에 어떻게 등장합니까.

사울왕의 실패는 사무엘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충격에 빠져있는 사무엘을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상 16:1

예수님과 아주 깊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다윗, 예수님의 계보에 뚜렷이 기록되어있는 다윗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사무엘은 어떻게 했을까요. ‘잘됬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말도 참 안듣더니.. 봐라 봐라 하나님이 새 왕을 세우신다고 하지 않느냐..’ 이렇게 신나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다윗을 찾아갔을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상황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민족의 지도자로 믿었고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이 그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존경했죠. 그러나 지금 사무엘에게는 아무런 실권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권력은 사울왕의 것이 되었죠. 그저 선지자로서의 권위만 남아있었지,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실권자인 사울왕과는 결별을 하지 않았나요.

20만이 넘는 군인을 동원할 수 있는 사울왕에 비해 사무엘은 군사적으로 누구와 맞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 왕의 아들도 멀쩡히  살아 있는데, 새로운 왕을 세우면 어떻게 되는겁니까.

이유가 어떻게 되든지 정치적으로 보면 반역입니다. 쿠데타 입니다. 군사도 없이 실권도 없이 쿠데타를 일으키라는 말이지요. 시대적 분위기로 보면 일가족이 몰살당할 일입니다. 사무엘의 가족만 죽겠습니까? 이새의 가족도 몰살당하겠죠. 새 왕을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방법을 모르고 있던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중 새 왕이 있으니 지금 그에게 가서 기름을 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당혹해 합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이건 좀 너무 무리스럽지 않나요. 이건 너무 과격한거 아닌가요. 이건 좀 너무 어렵 잖아요..’

하나님의 명령은 때로 이렇게 무모해 보일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 무모해 보이는 명령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무모해 보이고 너무나 합리적이지 못해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독교의 역사를 써내려 갔습니다. 왜 무모해 보이고 왜 그렇게 허황되게 보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원래 무모하시고 허황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눈으로는 그 크신 하나님의 계획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그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하니까 무모하고 허황되게 보이는 겁니다.

사무엘 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다 볼 수 없고,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안다는 말처럼 믿음가운데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믿는 자는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며 하나님은 바로 이 믿는 자들을 통하여 그분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사무엘은 두려웠지만 그 무모해 보이는 명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먼저 사울왕을 없애시고 새 왕을 세우셔도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믿음으로 이새의 아들 중에 왕이 될 자를 찾아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리고 다윗을 찾아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구분 짓습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사무엘상 16:12-13

별 것 아니어 보이는 이 일은 그러나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만큼 무모해 보이는 일이었죠. 다윗의 입장에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로 자신과 그 가족 모두가 몰살당할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무모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다윗은 자신의 중심을 보시며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임하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을 경험하며 더욱 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무모해 보였던 하나님의 계획으로 사무엘과 다윗은  죽지도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기름부음은 사울왕의 기름부음에 비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너무 큰 차이가 있었어요. 여러사람의 상석에 앉아 준비된 음식을 먹었던 사울왕과 달리 다윗은 마치 하객이 없는 초라한 결혼식을 치루는 것처럼 그렇게 축복과 축하를 받아야 할 그 순간을 조용하고 소박하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윗의 일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저 전과 똑같이 양떼를 돌보았죠.

그렇다면 다윗이 일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인다고 해서 다윗이 실제 아무련 변화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치기 소년 다윗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아 보였지만 기름부을때 하나님의 영이 적극적으로 그에게 임하여 그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고 그 모습이 사무엘상 17장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 내내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던 블레셋은 사울왕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커져갔고 이스라엘을 여러모양으로 착취해오던 블레셋의 입장에선 매우 불편한 상황이 전개되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입장에서 아주 좋은 기회가 생겼어요. 그것은 사울왕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며 사울왕이 악신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거죠. 한 국가의 왕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자 이스라엘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찾아왔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나라를 이끄는 리더의 정신상태, 영적상태는 수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바로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하여 유다 땅 에베스담밈에 진을 쳤습니다. 벌써 유다땅까지 들어온 거예요. 이스라엘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서로 만만히 볼수 없는 상대입니다. 운동경기 중에 다양한 겨루기 종목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겨루기 경기에서 실력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기선제압을 하는 거죠. 실질적인 경기에 앞서 심리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나 실력이 비슷하면 기선제압을 잘 하는 쪽이 반듯이 이깁니다. ‘나 이길것 같아’ 하는 쪽이 진짜 이깁니다. ‘나 질것 같아’ 하는 쪽이 진짜 져요.

그래서 블레셋인들은 이 기선제압을 하기 시작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사무엘상 17:4

키가 3 미터나 되는 거인 골리앗이 등장하지요. 그는 거의 인간 병기였습니다. 골리앗은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자신과 일대일로 싸울사람을 내보내라고 호통을 치기 시작합니다.

…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사무엘상 17:8-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성경속에서 이런 형태의 전쟁방식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헬라 문화권내의 싸움 방식이었죠. 헬라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블레셋이 지금 모든 군대를 대표해서 일대일 결투를 신청하는것은 어찌보면 그들의 전쟁 문화요, 매우 신사적으로 보이지만 골리앗의 막강한 전투력을 생각할 때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철저히 농락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 대한 모욕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었죠. 전쟁에 이기기 위해,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골리앗은 하나님 앞에서 참담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골리앗과 맞설 상대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죠.

하나님을 모욕하는데 어떻게 그냥 듣고만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골리앗 앞에 나서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군대 속에서 골리앗과 싸울 사람이 그렇게 하나도 없었을까요. 그 시대에 군인들 중에는 목동들도 많았는데 목동들은 원래 양때를 지키기 위해 곰과도 싸우고 사자도 쫓아버리고 늑대도 잡아죽이고 합니다. 다윗만 혼자 특별한 목동이 아니었다구요. 그런데 이 곰과 같은 골리앗과 싸우러 아무도 안나왔어요.

이스라엘 군인중에는 무술에 능한 사람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전쟁에 능한 일당 백의 장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한명도 없었을까요. 그러나 아무도 싸우러 안나왔어요..

골리앗은 사십일동안 아침 저녁으로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죠. 한 삼사일 하다 말았다면 이스라엘 군인들의 자존심이 그렇게 땅바닥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쩌다 한번 모욕을 당해도 힘든데 40일을 아침저녁으로 모욕을 당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거의 미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러 나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냥 무모해 보이니까 그랬을까요? 그냥 안될 것 같아 보이니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함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떠나 있었으니까 누구도 골리앗과 맞설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잊은 그들에게는 골리앗의 힘만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세상기준만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세상기준에 휘둘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다윗,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다윗이 나타납니다. 그러고는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았죠.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잊었던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사무엘상 17:26

그러고는 다윗은 막대기 하나들고 매끄러운 돌 다섯개를 주머니에 넣고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죠. 이런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을 잊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참 무모해 보였어요. 사울왕은 이 무모해 보이는 소년을 위해 자신의 갑옷, 가장 좋은 왕의 갑옷을 입혀 조금이나마 그 무모함을 덜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자, 가서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자’ 이러는 게 아니라 ‘자, 가서 내 갑옷 입어봐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울왕의 망가진 영성입니다. 골리앗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데 정작 하나님의 군대는 세상 것만 바라보는 겁니다. 아무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저 다윗이 무모해 보이기만 하는 겁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군인들, 모든 블레셋의 군인들이 전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혀 기대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기준으로는 너무나 무모해 보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를 숨죽여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모든 이가 다윗을 주목하는 순간 다윗이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사무엘상 17:45-47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얼마나 담대한 선포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잊은 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물매돌을 던져 골리앗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한 다윗은 그저 예전의 그 목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고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황이 어떻다 해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앞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모두가 불가능하게 생각하는 일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따로 용기를 낼 필요도 없이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며 나갈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에 감동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면 어떤 변화가 있는 겁니까. 그것은 기준이 바뀌는 일입니다. 그것은 삶의 기준을 바꾸는 일입니다. 세상중심의 기준은 하나님 중심의 기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세상적인 고정관념을 뛰어 넘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