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출애굽기 40:13-16 ]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가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출애굽기 40:13-16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그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이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자 여러분, 아론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봅시다.
아론을 아세요?
모세의 형이죠, 미리암의 동생이기도 해요.
대제사장이자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인데도 아론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아요. 뚜렷하게 기억나는 이야기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같지 않아 보이는 이 사람.
있는지 없는지 눈에 잘 띠지 않는 조연과 같은 이 사람 아론은,
이 사람 아론의 삶은, 우리에게 사람이 지닌 한계성과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능력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아론은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주변에서 말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 잖아요. 저도 아주 오래전에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을 만나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소설가를 꿈꾸고 있었어요. 졸업하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교원대를 다니다 군대에 온 친구였는데, 이 친구가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아, 이런사람들이 소설가가 되는 거구나..’ 할 정도로 그냥 말이 달달 합니다. 참 못생겼던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중엔 그 못생긴 얼굴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해요.
그 친구의 말하는 모습을 지금 생각해 보면 평범하지가 않았어요. 듣고 있으면 재미도 재미지만 마음이 참 편해지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로, 그 사람 말에는 자기자랑이 없어요. 둘째로, 그 사람 말에는 남에 대한 험담과 깎아 내림이 없어요. 셋째로, 그 사람 말은 추상적이지 않고 아주 현실감이 넘쳐요. 그래서 그 사람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었던 것 같아요. 부담감이 없으니까. 불편하지 않으니까. 진짜같으니까. 듣기 좋은 거예요. 그런데 그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서 그 사람의 성격이었던거죠. 사람이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 한겁니다.
아론이 그렇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아론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 잘하는 사람 아론은 이렇게 둥글둥글 유한 사람, 모나지 않은 편안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아론은 오랫만에 모세를 만나서 마음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별별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일을 안하겠다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출애굽기 4:14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안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별 핑계를 대고, 그러다 야단맞고, 마지못해서 길을 나선 모세가 애굽을 향해 가던 길에, 광야, 하나님의 산에서 아론을 만납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출애굽기 4:27-28
아론이 좀 까다롭거나, 좀 깐깐하거나, 성격이 모나고 그랬다면 모세의 말을 듣고 나서 ‘그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하느냐.. 그게 지금 말이 되냐.. 우리가 좀 이것 저것 따져 봐야 되는게 아니냐.. 넌 지금 노망난 거 아니냐..’ 이런 대화들이 다음에 나와야지 정상입니다.
그러나 “…아론에게 알리니라…” 라는 성경구절 다음으로 나오는 구절은 이렇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출애굽기 4:29-30
그러고는 그후로 평생에 걸쳐서 동생 모세를 섬기고 돕습니다. 쉬운일 아닙니다. 보통사람이 아닌거죠.
물론 미리암 누나 따라서 모세 흉도 한번 봤지만 절절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빕니다.
아론의 여러가지 행동들을 보면서 우리는 ‘음.. 아론이 참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아 보이는 사람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를 저지릅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릅니다. 거기서 이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시내산으로 들어가 사십 일 사십 야를 머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요.
엄마 손잡고 놀이동산에 갔다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충격에 빠져버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광분하게 됩니다.
그 순간 모세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그 곳에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을 예물, 증거궤, 진설병을 두는 상과 등잔대와 기구들, 그리고 성막과 제단과 성막의 뜰에 관하여 이야기 하십니다.
또한 등불관리, 제사장의 옷, 판결 흉패에 대해 이야기 하시며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 주십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들 입니까.
이 이야기들의 시작은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까지 올라갑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사람들은 하나님과 분리 되었습니다. 물과 기름이 분리되듯이 갈라져 나왔습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과 분리되어 소통할 수 없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분리는 생명의 근원이 단절됨을 말하는 겁니다. 얼마나 불안합니까. 얼마나 큰 공포입니까.
생명과 단절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뭘해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어요. 육신의 노예인 동시에 사망에 잡혀 종노릇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주셔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해 가셨습니다.
모세가 중보자의 역할을 한겁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단절의 극복을 체험한 거죠.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성막과 제단과 제사장과 제사장 가문을 세우셔서 이 백성 이스라엘과 지속적인 소통을 이어가시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시내산에서 모세와 하고 있던 거지요.
참 중요한 순간 아닙니까? 거의 다 된 거예요.
그런데,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다는 우리말처럼, 사람 좋아보이는 아론이 죄를 짓습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멀쩡하게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것 같은 아론이, 법 없이도 살 것같은 그 사람이, 그동안 착실하게 모세를 도아온 아론이 사고를 치는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죄로 인한 인간과의 단절을 성막과 제사장 바로 본인을 통하여 넘어서시려는 계획을 모세에게 알리고 있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애굽기 32:1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어요. 그냥 모세만 바라보았던 거죠.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모세가 없어지자, 마치 하나님을 잃은 것 처럼 당황하고 두려워하면서 아론을 협박합니다.
이럴때 아론은 어떻게 하는게 맞을까요. 우리는 정답을 잘 압니다.
맞서야죠. 불안에 떨며 날뛰는 군중을 엄하게 꾸짖으며 바른 길로 인도해야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모세를 기다리라고 위로해야죠.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에 대한 도전을 받아오지 않았나요. 우리도 가다가다 믿음에 대한 도전을 받지 않나요. 거기서 넘어지면 어떻게 되는겁니까. 배교,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 되는 겁니다.
‘어쩔수 없었어..’ 이런 말은 안되는 겁니다.
그렇게 장점이 많아보이는 보기 드문사람 아론이 위기의 순간에 슬쩍 넘어가보려 꼼수를 씁니다.
정면으로 맞서야 할 순간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단 말이에요.
믿음이요, 편안할 때, 순조로울 때 빛나지 않습니다. 환영받을 때, 칭찬받을 때 구분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선택의 순간에 치욕과 핍박을 믿음때문에 받아야하는 순간에, 그때 믿음은 빛납니다. 시련과 고난 앞에서 참된 믿음은 뚜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 믿음이 없었어요.. 아론은.
자, 이 정도면 아론은 어떻게 되야하나요. 그냥 죽임을 당함이 맞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 죄인, 이렇게 부족한 사람 아론을 데려다가 하나님의 존귀함이 나타나는 옷 제사장의 옷을 입히십니다.
금송아지를 보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아론을 질책하자 ‘내가 금을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나이다’ 하며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내뱉은 어리석고 나약한 아론을 하나님은 제사장의 띠를 띄우며 흉패를 붙이고 거룩한 관을 씌우십니다. 아론이 잘나서 제사장이 된게 아닙니다.
여러분, 왕같은 제사장이란 말 들어보셨죠.
어디에 나오는 말입니까?
베드로전서 2:9에 나오는 말이죠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하나님이 선택한 성도들을 향하여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이 됩니까?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나라가 됩니까? 어떻게요?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잖아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죄가 쌓여 있는지. 그런 나를 왜, 어떻게 제사장을 삼으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죄인된 아론을 살리시는 사랑의 하나님
죄인된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아론은 몸에 가득한 죄를 싸안고 하나님을 만나는 중보자의 역할,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었죠. 더러운 오물냄새를 풍풍 풍기며 정결한 하나님 앞에 그냥 나아갈수는 없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한 모든 명령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같이 하여 이레 동안 위임식을 행하되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며
출애굽기 29:35-36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기 위해서는 칠일동안 매일 수송아지를 잡아 대속의 속죄제, 피흘림의 속죄제를 지내야 했습니다. 아론은 죄를 씻고 또 씻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일곱번을 씻어내려야 할, 완벽하게 씻어야 할, 그래야 정결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그래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더러운 죄인이란 말씀입니다.
이것이 아론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정결함 없이, 속죄함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아론이 이렇게 칠일동안 죄를 씻는 제사, 즉 속죄제를 드렸으니까 아무때나 하나님을 만나러 나가면 될까요? 아니요, 안됩니다.
회막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또 다시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또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잘못해서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사장들의 옷에는 방울이 달려 있었습니다. 움직이면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겁니다. 제사장이 회막에 들어갔는데 딸랑딸랑 소리가 안나면 죽은 겁니다.
죽은 제사장의 시체를 회막 밖에서, 들어갈때 부터 묶고 들어간 끈을 이용해서 끌어내야 합니다.
왜냐면, 시체 가지러 잘못 들어갔다가 그 사람들도 다 죽으니까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냥 이웃집 아저씨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냥 유명한 사람 팬사인회 가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과 만남 그 자체가 죄인된 우리에게는 도전인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편안하게 가볍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걸 너무 당연시 합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라고 여기죠. 그게 얼마나 무서운 착각인줄 아십니까.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44-46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론과 같이 칠일동안 속죄제를 지내고 또 다시 속죄제를 지낸 뒤에야 하나님께 나가지 않고, 바로,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믿는 자의 죄를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러 나아가는 것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생각은 피흘려 죽으신 예수의 보혈 피를 값없이 여기는 생각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족한 아론의 계보를 따르는 제사장이 아니십니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히브리서 7:16-17
우리는 연약한 인간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연약한 아론을 제사장으로 두고 율법을 통헤 구원을 얻으려한 이스라엘과 우리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끔 목사를 제사장 취급하는 분이 있는데 그건 정말 비 성경적입니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목사는 인간 제사장인 아론의 반차를 쫓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목사는 레위지파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7:22
이 말씀은 우리 앞에 사람 제사장이 더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담보로 구원의 언약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브리서 7:24-25
하나님을 만날 자격조차 없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함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온 죄와, 살면서 사는 시간만큼 쌓아놓은 죄가 있음에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수송아지를 잡아가며 칠일동안 죄를 씻는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죽을지 살지 몰라서 딸랑딸랑 방울 달린 옷을 입지 않아도, 율법에 나와있는 순서 하나라도 틀려 죽을까봐 떨 필요없이, 여호와 하나님 거룩한 나의 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힘입어 직접 나의 간구함을 아버지 하나님께 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독생자 예수, 그분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흘린 핏값으로 우리의 죄가 씻김을 얻었습니다.
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요.
그 손을 놓치지 마십시요.
그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