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목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오늘 함께 은혜나누실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불교에서 스님의 정식 명칭은 비구승입니다. 남자 스님을 비구라고 하고 여자 스님은 비구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구라는 말은 인도말로 비쿠에서 왔다고 합니다. 비쿠는 음식을 구걸하는 사람, 즉  거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구승이라 하면  바리때를 들고 인가에 가서 동냥을 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불교의 수행자(스님)와 일반 걸인은 겉보기에는 똑같이 남루한 옷에 음식을 동냥해 연명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일반 걸인은 남들에게(외부에서) 밥을 구하여 자신의 육체(내부)를 돕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비구승 또한 외부에서 (남들에게) 밥을 구하여 육체를(내부를) 돕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부 깊숙한데서 불법(진리)을 구하여 외부를 (남들을) 돕는다는 점에서 걸인과 다릅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라는 동일한 범주로 분류되는 사회 현상이기에 여러모로 비교 가능합니다.

불교의 사찰은 기독교의 교회에 비유할 수 있고 불교의 법전은 기독교의 성경에 비유할 수 있으며 불교의 스님은 기독교의 목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스님이 동냥을 해서 육체를 유지한다면 기독교의 목사는 성도의 헌금으로 생활을 유지합니다. 이렇듯 동냥과 헌금은 매우 닮은 듯 하면서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의외로 우리가 깨닫는 바가 많습니다.

우선 동냥은 자비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동냥을 거지가 먹을 것을 구하는 행위로만 알고있는데 원래 동냥이란 말은 불교용어 ‘동령’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동냥은 동령(요령을 흔들다)이라는 말을 비하한 말로써 조선시대에 스님들이 걸식할 때 지금처럼 목탁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요령을 (짤랑짤랑) 흔들었던 것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왜 동냥을 하는걸까?>

모든 고등 종교는 보편적 선을 추구합니다. 불교 또한 고등 종교이기에 선을 추구합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선은 자비입니다. 그리고 자비의 핵심은 ‘남을 돕는 것’ 입니다. 그런데 왜 남을 돕는 것을 핵심가치로 여기는 불교의 수행승이 남을 돕지 않고 도리어 남에게 도움을 받으며 수행을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남을 돕는 방법에는 여러 등급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을 돕는 다면 이는 쉬운 것으로 하급에 속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물질을 시주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즉 물질로 남을 돕는 것을 가장 쉬운 자비로 여겼던 것입니다. 참 수준 높지요? 우리로서는 지갑 여는 일이 제일 어려운데 그것을 가장 쉬운일로 여겼다니 말입니다. 그 다음 등급으로는 시간을 내는 일입니다. 시간을 쓴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말이며 이는 곧 마음을 주는 일입니다. 물질은 주어버리고 나면 끝이지만 시간은 끝까지 함께 해 주어야만 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돈 보다는 마음쓰는 일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최고의 높은 수준의 자비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법이라고 하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를 보시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진리를 설파하는 ‘법보시’를 물질을 베푸는 일보다도, 그리고 마음을 나누는 일보다도 더 등급이 높은 최고의 자비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깨우친 자는 곧 열반, 해탈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베품보다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움보다 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법을 베풀기 위해서는 우선 법을 깨우쳐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해야할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일은 올바른 법보시를 베풀기 위한 진리탐구였던 것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바로 이 일에 부름받은 사람이며 법보시에 매진하기 위해서  양식을 동냥하는 것입니다. 법보시는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진리를 깨닫게 하여 구원으로 이끄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농사짓고 밥을 하는 속세의 일을 떠나는 것입니다.

즉 스님들이 동냥을 하는 이유는 (무소유라든가 여러 부수적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체의 속세에 관한 일을 떠나 오직 진리 탐구에 매진하여 올바른 진리를 베풀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스님들의 동냥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있기에 옛날에는 스님들이 민가에 내려와  요령을 흔들며 음식을 구하면 사람들은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음식물을 스님들의 바리때에 조심스레 담아주며 오히려 감사했던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불교에서 스님들의 당당한 동냥 요구와 이에 대한 당연하고도 공손한 시주는 스님들에게 베푼 물질이 결국에는 자신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선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 혜민 스님 사건>

얼마전 불교계에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의 베스트 셀러 로 유명한 혜민 스님 이야기 입니다. 혜민스님은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 출신에다 IT 쪽에도 해박하여 ‘코끼리’라는 명상 앱을 만든 ‘마음수업’이라는 주식회사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고리타분한 이미지 였던 불교계에 참신한 이미지를 보여준 그는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많아서 TV프로그램등에도 출연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된것은  한 TV 프로그램 방영중에 그 스님의 남산뷰 자택이 소개되고 또한  미국 뉴욕에 있는 아파트 구매의혹까지 받으며 무소유가 아닌 이른바 ‘풀소유’ 논란이 불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미국 하버드 대학 출신의 똑똑한 스님이 무슨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능력으로 종교의 대중화를 이끄는 가운데 남산뷰가 보이는 자택에서 기거하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은 아닙니다.

종교인으로서 비록 보기에는 안좋게 보여질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심하게 지탄받은 만한 일도 커다란 이슈가 될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벤츠타고 다니는 스님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정작 문제가 된것은 혜민 스님의 안거 기록이었습니다.

안거란 불교에서 (동안거와 하안거) 겨울과 여름 이렇게 일년에 두차례 스님들이 바깥 출입을 끊고 참선 수행에 힘쓰는 일을 말합니다. 안거 기간중 스님들의 생활은 엄격함을 넘어서 고행에 가깝다고 합니다. 새벽 3시에 기상해 정돈을 마친 후 108배 기도를 시작으로 하루 평균 11시간 참선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참선은 일종의 기도로써 하루에 11시간씩 오직 기도만 하며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안거에 몇 차례 참여했는지를 승려의 수행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문제는 혜민 스님의 경우 명상 앱을 개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여온 데 비해 안거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즉 법 보시를 위한 진리 탐구와 참선이 승려의 메인 잡인데도 불구하고 혜민 스님에게는 안거 기록이 전무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자 그동안 혜민 스님을 옹호하던 여론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혜민스님은 모든 활동은 중단하고 반성하며 칩거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보시와 헌금>

제가 설교중에 불교의 스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목사로서 이에 대해  느낀 바와 배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불교도들은 스님들이 진리탐구에 매진할 것을 믿고 그들의 진리탐구를 돕기 위해 기꺼이 보시를 행합니다. 즉 스님들이 수행에 힘쓸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최소한 불교 신자들은 자신의 공양이 (자신의 헌금이) 어떤 원리로 자신에게 복이 되는 지를,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왜 헌금을 해야하는 지를 이해하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의 헌금에 대한 이해는 이에 못미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신자가 십일조와 헌금을 기꺼이 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성경이 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이 이를 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레위 족속의 생계를 위한 분깃으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록하고 있고 또한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게 될 것과 불순종함으로써 벌을 받게 될 것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다른데 신약성경의 경우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연보를 강조합니다. 대표적으로 고린도 후서를 보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소아시아 각지의 교회들에게 연보할 것을 종용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헌금을 하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연보를 하든 우리는 그 헌금이 결국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헌금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신자들이 불교신자와는 달리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낸 십일조와 헌금이 어떠한 원리로써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행위 자체는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복을 많이 받고 천국도 수월하게 갈 수 있다는 믿음은 그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라는 말씀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좌정하시고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 해서 사는 듯한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는 곧 내가 그리스도 예수 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이 사셨던 대로, 그분의 가르침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우리는 다 압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헌금 많이 낸다고, 주일성수 했다고, 목사나 장로의 직분을 가졌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하 그렇지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선한 일 많이 하고, 성경 공부 더 열심히 하고, 예수님을 더욱 철저하게 믿으라는 소리구나..’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부분이 우리가 많이 헷갈려하는 부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헌금이나 선행이 구원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예수님을 철저하게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구원의 메카니즘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헌금이나(자선 활동등) 선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 업적이 다 계산되어 천국 문앞에서 저울로 달아 너는 합격, 너는 불합격 이렇데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헌금이나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기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우리의 물질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눌 때)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피땀흘려 번 돈을 (피같은 내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눌 때 그리고 나의 도움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고 생명을 되찾아 가는 모습을 보게될 때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정화됩니다. 나의 피와 땀으로 되 살아난 이들이 더 이상 남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말로만 끝날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정말 내 몸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웃이 배고파 하고 있는데 그를 정말 내 몸처럼 생각한다면 그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줄 것입니다. 이웃이 추위에 떨고 있으면 그를 따뜻하게 입히는 것이 정말 내 몸처럼 사람하는 것이지 그저 말로만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내몸처럼 느껴질 때, 그래서 이웃에게 내 몸에게 하듯이 나누고 베풀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선행과 헌금이 우리를 구원하는 원리는 바로 이렇습니다. 선행과 헌금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계적으로 카운트 되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 행위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고 깨끗하게 되어 서로가 한 몸임을 깨닫게되고 서로간에 하나됨을 느끼는 관계속에서 평안함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그저 기계적으로 헌금 많이 하면, 자선 사업 많이 하면, 선교많이 하면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 가서 상급을 많이 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온통 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베푸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 속에 사는 삶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늘 한 몸처럼 평안한 관계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하나됨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곧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나와 하나라는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안에서는 경쟁할 필요도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도 없으니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첫번째로 한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부끄러움에 몸을 가린 행위였습니다. 이는 서로를 한 몸이 아닌 남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서로를 남으로 여기는 것이 곧 원죄로 인한 벌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구원받는 원리를 깨우쳤다면 우리는 남을 돕는 일 못지않게 남에게 도움을 받는일이 (그 도움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이) 또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도움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사함과 당당함으로 받는 것은 도움주는 남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믿음의 고백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냥을 하는 스님이 당당함과 감사함으로 음식을 요구하듯이 말입니다.

오늘은 당신의 도움으로 내가 도움을 받지만 언제가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줄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이니까요.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시간 천국은 여기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 마음 가운데 있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며 지금 이 시간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