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사람들 사이에 ’장애인‘이란 말 대신에 ‘장애우’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장애인을 가까운 친구처럼 여겨 그들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을 최소화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기 위해 장애우란 말이 널리 애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원래 1980년대 후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장애인 인권운동을 전개하며 ‘함께걸음’이라는 잡지발간을 통해 일반 대중의 인식 개선에 앞장섰던 ‘이성재’ 변호사가 –나중에 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도 역임- 처음으로 창안, 제시하였다. 즉, 한국사회에 인권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뜨거워진 1980년대에도 여전히 왜곡된 장애인관을 수정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각성을 요구하자는 취지에서 보급된 용어가 바로 ‘장애우’이다. 장애인을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멀리 동떨어진 위치에 놓인 사람이 아닌 친구처럼 가깝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 그들과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이 용어 사용의 기본 취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애우’라는 용어는 수많은 한계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즉, “나는 장애우입니다.”라는 말에서 느끼는 어색함처럼 장애우라는 표현은 장애인이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기에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어린 아이가 장애를 가진 어른을 가리켜 ‘친구’라고 부르는 것도 큰 실례가 될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단어가 지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인간관계의 종속성과 수동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장애우’라는 표현의 주체(Signifier)는 장애인 자신이 아니라 장애인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이며 그들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동정과 시혜를 베푸는 비장애인의 ‘노력’인 것이다. 따라서 ‘장애우’는 비장애인의 시각으로 장애인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장애인과의 연대의 가치를 자선의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타자화하여 장애인 스스로 인생의 주체,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것을 방해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장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인지하는 ‘각성의 시기’는 지났으니 유효 기간이 지난 시대적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또한 ‘장애우’는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사회적 단어이므로 언중에게 유포되어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서는 부적합하다. 따라서 언론이나 관공서, 사회단체, 교회 같은 공공기관들이 앞장서 ‘장애우‘ 대신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공식용어인 ’장애인‘을 사용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 또한 ’장애인‘과 대칭되는 용어 역시 상당한 주관성과 편향성을 띄는 ’정상인‘이나 ’비장애인‘보다는 그냥 ’일반인‘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작품에서처럼 각 개인이 가진 이름은 곧 그의 정체성이다. 각자에게 합당한 이름이 있고 누가 그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비로서 그 사람의 존재와 본질이 회복되고 양자가 조화롭게 일치되는 것이다. 장애인들 역시 한계를 극복하고 이 사회에서 고귀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동등하게 대우받으며 그 꿈과 이상을 마음껏 펼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진 본질과 정체성을 명확히 표현해주는 이름이 필요하며, 그 적합한 이름을 모든 사회구성원이 인정하고 사용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자아관이 형성되고 관계성이 회복되길 바란다.
 
이준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