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봄의 법칙>

민환기 목사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1-2

어떤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위해 폐쇄된 철교를 건너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철교를 건너다가 어지럼증으로 강물에 빠지는 사건도 발생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통통하고 배가 볼록 튀어나온 아이는 끄떡없이 철교를 잘 건너다녔습니다.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다른 아이들은 철교를 건너다가 밑을 내려다보면 어지러움증이 생겨 밑으로 빠지는데 배가 볼록한 이 아이는 밑을 내려다볼 수 없기 때문에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간혹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문제 상황만을 응시하며 거기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넘어 목표를 바라볼 때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허다한 증인들이란 바로 앞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모세, 라합 등 즉 믿음의 선진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을 보면서 6절을 요절로 정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요절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상 주시는” 즉 축복 받는 비결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11장에서의 정말 중요한 요지는 7절 이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을 통하여 증거 된 진정한 믿음을 본 받으라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는 이러한 믿음의 주체이자 절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믿음의 선진들에 관한 내용을 다루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또한 예수그리스도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그분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며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자라고 히브리서 12장 서론부분에서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의 존재의 이유와 삶의 목적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먼저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6

이처럼 아담과 하와는 만지지도 먹지도 말아야할 선악과를 바라보았기에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보게 되면 결국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모든 인류에 죄가 들어오게 됨으로, 여자에겐 해산의 고통이, 땅에는 저주가, 남자에겐 평생 수고하여 수확하는 그리고 그 결국엔 흙으로 돌아가는 사망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죄의 근원지로부터 빨리 눈을 돌이켜 생명의 근원지로 고정시키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 3:14-15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4-15

이처럼 무엇을 바라보느냐하는 것은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냐 아니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냐라는 생명을 달리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은 당연히 후자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을 택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1) 죄를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그리고 그 이후 2절에서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거운 것”의 원어적 의미는 운동선수가 운동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체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최선을 다하는데 있어 장애물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수영 선수에게는 긴 머리카락조차 장애물이 되며 육상 경주자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의복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경주를 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는 영적 장애물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세상 염려나 혹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애착,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얽매이게 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뿐더러 단절시킵니다.

실제로 여기에서는 히브리서 10: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음 구원은 거리끼고, 율법의 행위 즉 구약의 희생 제사만이 죄사함을 얻는다고 고집하는 유대교인들의 잘못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있어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시키는 죄를 벗어버리기 위해서 항상 영적을 깨어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엡 4:22-24 말씀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4:22-24

죄로 오염된 타락한 옛사람과의 결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심령, 즉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다”의 동사 시제가 현재형 수동태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형의 경우, 그리스도 안에서의 심령의 변화와 갱신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수통태의 경우, 심령의 새로워짐은 성령이 그 안에 함께 거하심으로 가능케 되며 이로 인해 그 사람의 사고 방식이 새로워지며 생활이 변화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두가지가 병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대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독수리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빠져 죽었는지 아십니까? 아주 추운 겨울에 나이애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얼음덩어리에는 얼어죽은 양이 한 마리 붙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먹이감을 찾던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는 죽은 양고기를 먹느라 점점 폭포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이 독수리와 얼어 죽은 양은 나이애가라 폭포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서야 독수리는 날개 짓을 하며 하늘을 날아 오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아 오르려는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양털 숙에 깊이 박힌 발톱이 얼어서 바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마치 무엇인가를 풍성하게 제공해 주는 것 같지만, 죄의 결과는 항상 우리를 무엇인가의 노예로 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국에는 비참한 파멸과 죽음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2)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지만 운동 경기를 하는 선수는 끈질긴 인내력이 있어야 합니다. 경기를 대비할 때에나 직접 경기에 임해서나 선수는 끝까지 인내할 때 그 목적하는 바를 이 룰 수 있습니다. 이에 본문 1절에서도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고난 받는 성도가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위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본문 2절에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고난의 자리에 처하사 우리가 당할 고난을 먼저 체험하시고, 그 고난을 능히 감당하사 우리로 하여금 어떤 고난 중에도 인내할 것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친히 성도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먼저 걸어가사 모든 성도들이 앞서 가신 고난의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자취를 힘써 따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은 고난에 처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더 큰 고난을 감당하신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인내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고난 받는 성도가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위로는 그리스도께서 그 엄청난 고난,특히 죽음의 고통까지도 이기고 부활하사 승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극히 절망적이고 완전히 실패한 듯한 상황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사 최종 승리를 이루신 주님은 우리 역시 그 어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친히 보증하사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참된 위로와 평안을 얻으시길 그리고 끝내 소망을 잃지 않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3)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2절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 성경에서는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이 바로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우리의 믿음을 가능케 하신 근원이시며, 온전한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실 절대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최근에 사용하는 개정판에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 NIV에서는 fix our eyes on Jesus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fix란 말은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고정이란 단어의 의미는 한곳에 움직이지 않게 붙박는 것 혹은 어떤 인물이나 대상에 대해서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바라보자의 의미는 내 눈이 예수님에게만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에게만 절대적인 신뢰와 변함없는 사랑을 갖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KJV에서는 ‘예수를 바라보자’를 lookig unto Jesus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이 뜻은 단순히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들에 대하여 기대하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듯이, 믿음의 눈이 떠지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을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42. 195km의 전구간을 쉼 없이 뛸 수 있는 힘은 체력적인 힘만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힘, 목표에 대한 강한 집착이 전구간 완주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기쁨을 기대하셨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 보좌의 우편에 다시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있어 이러한 경주 같은 신앙생활은 무엇으로 인하여 우리는 완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목표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고단한 경주에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영원하고 크나 큰 천국의 소망을 이루실 주체이자 절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단편소설 “큰바위얼굴” (저자: 나다니엘)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어니스트는 어느 작은 산골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곳 절벽에는 예전부터 사람얼굴모양과 비슷한 큰바위얼굴이 있었습니다. 그 고장사람들 모두가 다 닮고 싶어 하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얼굴이었죠. 내려오는 전설로는 이 산골짜기에서 후에 큰바위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니스트는 이런 큰바위얼굴을 매일매일 바라보고 그렇게 되고자 흠모하였습니다. 큰바위얼굴은 어니스트에게 있어서 선생님이자 삶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 마을에 돈 많은 재벌,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장군, 그리고 뛰어난 지성을 겸비한 정치인 이 모두가 큰바위얼굴을 한때 닮았었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한 천재적인 시인의 발견으로 그 고장 모든 사람들은 결국엔 어니스트가 정말 인자하고 자비로운 큰바위얼굴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닮아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 사모한다면, 우리 또한 그분과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주님이기에 우리가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하나 고쳐나가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하나하나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러다보면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무지하고 무능한 자기 자신과 열악한 환경,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보면 낙심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한계상황에서 좌절하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어떤 고난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똑바로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미국의 부흥 사였던 무디(Dwight L.Moody 1837-1899)는 말하기를 ① “그대 자신을 믿어보라! 그대는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 ② 친구를 믿어보라! 어느 날 그들은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 혜어질것이다. ③ 그대의 명성을 믿어보라! 어느때 훼방하는 혀가 그것을 뒤집어 엎을 것이다. ④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보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오직 주만 바라보며 가는 것이며 이길 뒤에는 바로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환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썩어질 것들로 인해 죄에 얽매이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홍해든지 광야든지 십자가의 길이든지 세상의 풍파를 바라보지 말고 죄악에서 돌이켜 끝까지 인내하므로서 우리의 생명이요 부활되시는 믿음의 주체요 절대자이신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 저와 여러분은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는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원한 천국의 삶을 소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