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본 영화 <파란자전거(권영국 감독, 2007년 作>에서 주인공 ‘동규’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해 한 팔을 잃고 의수를 착용한 채 살아가는 지체장애인이다. 두 팔이 온전한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은 한 팔이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동규의 얼굴에는 늘 수심이 가득하고 허무함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이 작품을 보며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장애인 캐릭터들은 왜 이토록 장애의 아픔에만 갇혀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만이 등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는 현실세계를 모방하여 재현하는 가상의 영역이지만 거꾸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일례로 내가 아직 미국 유학을 오기 전, 그래서 그곳에 사는 인디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어린 시절, 그들의 이미지는 이미 내 인식 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당시는 TV에서 서부영화를 자주 보여줬었는데, 영화 속 인디언들은 문명인인 백인들과는 달리 미개했으며 요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정의롭고 착한’ 백인들을 위협하는 야만인들로 묘사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디언의 이미지가 바뀐 것은 성인이 된 후 미국 인디언의 문화를 다룬 서적이나 다큐멘터리 등을 본 이후였다. 서부영화 속 인디언의 모습은,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지만 지금은 힘없는 소수자로 전락해버린 인디언 자신들의 관점이 아니라, 미국사회의 주류계층이자 할리우드를 지배하고 있었던 백인들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외부세계와의 끊임없는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교류나 사람들 사이의 단순한 접촉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이해가 바탕에 깔린 대등한 교류를 뜻한다고 할 때, 우리 한국영화 속에 나타난 일반인 캐릭터들은 외모나 성격, 직업, 살아가는 일상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내성적인 성격의 인물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맺으며 다양한 경험을 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장애인 캐릭터들은 성격이나 직업, 외모 등에 상관없이 장애의 아픔에 갇혀서 가족이나 아주 소수의 주변 사람들과만 소통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로만 묘사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장애인들은 장애의 한계로 인해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극히 제한된 모습으로 밖에 삶을 살아 갈 수 없다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06년에 개봉한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 나오는 발달장애인 ‘인섭’은 외부사람들은 물론 가족들과도 전혀 소통을 못하여 가족을 불행에 빠트리는 인물이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의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는 교류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하루 종일 혼자서 벽만 쳐다보거나 거울 장난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불쌍하지만 한심한 사람으로, <사랑 따윈 필요 없어>의 시각장애인 류민은 시력 상실로 인해 외부 세상과의 문을 닫은 채 극히 제한적인 사람들과만 교류를 하는 답답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또 <맨발의 기봉이>와 <허브>에 등장하는 발달장애인들은 이장이나 어머니, 어린아이들 등 자신의 나이와는 맞지 않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이들 발달장애인들은 지능이 낮기 때문에 또래와는 소통을 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이란 영화에서는 주인공 ‘류’가 듣거나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화면의 변형과 자막을 사용하고 있으며, 류의 뒤에서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죽게 될 때에도 귀가 안 들리기 때문에 아이의 익사를 막지 못해 결국 아이 아빠에게 죽음을 당해 연쇄살인이 일어난다는, 지극히 황당한 설정으로 자신을 방어하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장애인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이나영 주연의 영화 <후아유>의 청각장애인 ‘인주’는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이지만 듣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현실에서의 사람들과 소통을 회피하고 가상의 세계 사람들과만 교류한다는 내용이고, 고 이은주가 주인공인 <안녕 UFO>의 시각장애인은 직장을 다니고 밝고 활달한 성격으로 그려지면서도 제대로 소통을 하며 지내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파란자전거>의 주인공 동규도 자기 일을 갖고 연인과 사랑도 하며 친구들도 만나지만 그의 가슴은 항상 장애로 인한 슬픔과 원망만이 가득 차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다고 애기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는 이처럼 장애에 갇혀 세상과의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쌍한 장애인들을 지켜주고 ‘구원’해주는 존재는 바로 비장애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할 때 이야기 하는 것들>에서는 동생이, <오아시스>에서는, 전과자가, <사랑 따윈 필요 없어>에서는 호스트바의 제비가, <안녕 UFO>에서는 버스기사가, <후아유>에서는 게임 개발자가, <맨발의 기봉이>에서는 동네 이장이, <허브>와 <말아톤>에서는 어머니가, <파란자전거>에서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여인들이 장애를 지닌 주인공 곁에서 이들을 보호해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은 하나 같이 장애의 한계에 갇혀 허덕대기만 하는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항상 일반인의 도움이나 보살핌이 필요하며 이들의 지원 없이는 세상과 소통을 하기 힘든 불완전한 존재라고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러한 장애인들의 모습은 사회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과 일치한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애인의 통념과 각종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장애인의 이미지는 항상 장애의 아픔 때문에 도와줘야 할 존재,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살아가야만 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낙인 찍혀 있다. 영화의 제작진들은 이러한 도식화된(stereo-typed) 사회통념을 별다른 고민 없이 영화에 그대로 반영하여 재현하는 것이다. 모든 미디어의 속성이 그렇듯이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다시 현실에 영향을 주어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영화 속 천편일률적인 장애인 캐릭터는, 장애인은 항상 의존적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대다수 일반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장애인관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또다시 왜곡된 장애인의 이미지를 새롭게 심어주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는 다시 현실 속의 장애인들을 규정짓고 장애인들의 삶을 더욱더 종속적인 존재로 만들어 가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잘못된 인식의 악순환만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외국 영화들은 다양한 모습의 장애인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처럼 장애의 아픔에만 갇혀 있는 캐릭터도 있지만, ‘탐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나 <아이엠 샘>에서는 지능이 낮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들의 도움 없이 운명에 대항하며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며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일랜드의 작가이자 화가로 활동했던 뇌성마비 장애인 ‘크리스티 브라운’의 삶을 그린 <나의 왼발> 역시 장애로 인한 아픔과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7월4일생>의 지체장애인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중도 장애인이지만 주변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의 청각장애인은, 장애인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일반 사람들과 소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 스스로가 인식의 전환을 통해 장애인을 편견 없이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또한 꼭 중요한 역이 아니더라도 많은 영화 속에서 평범하지만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등장시켜서 그들이 결코 값싼 도움이나 동정심 따위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며 장애에만 갇혀 지내는 불쌍한 사람도, 극적인 삶의 표본도 아닌, 그저 장애를 지녔을 뿐이지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혹시라도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들이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여 장애인들이 당당한 인격체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파란자전거>의 권용국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사실 장애는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극복되지도 않는다.”라고 애기하면서도, 정작 영화 속에서의 동규 모습은 항상 장애의 아픔에만 갇혀서 웃거나 즐거워하는 모습 하나 없이 오직 남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감독은 기존의 장애인 캐릭터들이 너무 드라마틱하다며 이를 비판하려다가 오히려 평생을 자신의 운명적 한계에만 갇혀 사는 정말로 불쌍한 장애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권용국 감독은 자신이 장애인이라 누구보다 장애인의 심정을 잘 알지만 사회에서 장애인을 생각하는 왜곡된 의식 구조에 대한 고민이 없이 기존 한국영화 속의 부정적인 장애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우리 영화의 제작진들의 머릿속에는 서부영화 속의 인디언들처럼 한쪽으로만 치우친 왜곡된 장애인의 이미지가 너무도 깊이 각인 되어있는 것 같다. 이것은 장애인들은 장애의 아픔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대다수 관객들에게 또다시 왜곡된 장애인의 이미지를 심어줄 뿐이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작진들의 정형화된 장애인 이미지를 버리고 우리 현실 속의 장애인들의 삶을 치열하게 연구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글 | 이준수 목사